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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Apr 17. 2024

밀드레드가 살았다면?

에르난 디아스(2023). 트러스트. 문학동네

밀드레드가 살았다면, 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다. 밀드레드는 앤드루 베벨의 아내로 소설 속에서 암으로 죽는다. 정신질환으로 죽지 않는다. 죽긴 죽지만, 어떻게 죽는지 중요하지 않다. 이걸 밝히는 소설이 아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죽는다. 소설에서. 이건 허구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 허구의 인물이 살았다면 이고 가정하다니. 제목은 《트러스트》.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시대 배경은 더욱더 그렇고. 1929년 대공황 혹은 월스트리트 대폭락이 배경이다.


소설은 네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 밀드레드 베벨은 마지막 부분 〈선물〉에 직접 나온다. 읽기를 통해서. 암으로 죽어가면서 쓴 일기. 이걸 끝까지 그녀가 썼는지 의문이긴 한데, 당연히 이걸 쓴 건 작가이다. 에르난 디아즈. 들어보지 못했지만 미국에선 엄청 유명한 작가인가 보다. 이 책으로 퓰리처상도 받고, 그해(2022) 올해의 책으로 각종 매체에서 추천을 했다니. 책 구성이 우선 독특한데, 이것도 한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대단한 책이라는 명성을 가져오게 한.


그녀(밀드레드)가 쓴 일기가 발견된 건 전적으로 아이다 파르텐자 덕분이다. 그녀는 세 번째 구성인 〈회고록을 기억하며〉의 주인공이다. 파르텐자라는 이탈리아계 여성으로 회고록을 굳이 기억하려 한 이유는 진짜 작가 디아스가 독자를 배려한 것 같다. 이 부분이 없었으면 도대체 이 책은 뭐야 하고 작가를 호되게 나무랐을 것 같은데, 전체 책 중에서 가장 잘 읽히고, 이 부분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전체적으로 이해된다(나만!). 왜냐하면, 여기서 알아야 할 건 〈회고록을 기억하며〉의 그 회고록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회고록이란 것이 이 책 두 번째 부분 〈나의 인생〉이란 것을 아는 것도 핵심이다. 이걸 그녀가 썼으니 아이다 파르텐자가 키맨 아니 키걸(?)이다.


그럼 금융황제 앤드루 베벨은 굳이 왜 자서전을 쓰려고 한 것일까? 이건 바로 첫 번째 부분 〈채권〉때문이다. 해럴드 배너가 쓴 소설 속 소설을 앤드루 베벨이 싫어했기에. 소설에서 자신을 돈만 아는 냉혈한으로 묘사하고 자기 아내 밀드레드가 정신질환으로 죽었다고 묘사했기 때문에. 더욱이 자기 아내 밀드레드야 말로 앤드루 베벨보다 더 뛰어난 투자자이기에 이를 감추고 싶었던 것이 더 큰 이유일 것도 같다. 이걸 알게 되는 건 전적으로 파르텐자의 공이니, 그녀가 역시나 키걸(?)이다. 이상하게 자서전을 의뢰한 앤드루 베벨이 자꾸만 자기 아내를 현모양처로 묘사되도록 했는데, 바로 이 의문 때문에 파르텐자가 밀드레드의 일기를 손에 넣게 된다.


이 소설 〈채권〉에서 주인공은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이 아니고 벤저민과 헬렌으로 나온다. 이 부분을 읽다 재미가 없어서 포기하려고 했었다. 다음 부분인  〈나의 인생〉도 그냥 멈추려 했다가, 그 자서전이란 것이 별로 재미없었는데, 그럼 파르텐자는 별 볼일 없는 작가? 아무튼, 그때까지 읽은 것이 아까워 더 읽다가 소설의 전체 구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게 〈회고록을 기억하며〉였으니.  마지막 부분은 〈선물〉이라서 작가가 독자에게 선물로 밀드레드의 일기를 준 것으로 오해(?) 했었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책 분량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파르텐자가 쓴 부분을 읽어봐도, 작가가 1920년대 대공황 전후 전설적인 금융황제, 실제로는 그 아내를 왜 등장시켰는지 명확하지 않다(나만!). 그렇지만, 당시 시대를 배경으로 돈과 성공, 사랑, 부, 명예와 더불어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면서 무정부주의자인 파르텐자의 아버지를 등장시킴으로써, 가볍게만 읽을 수 없는 소설로 만들었던 것 사실이다. 더불어 독특한 소설 구성까지  이 책을 미국에서 왜 올해의 책으로 추천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했지만,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밀드레드가 살았다면 이라고 붙인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보통 평범한 작가라면 이런 구성을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란 점을 넘어서 냉혹한으로 돈만 추구한 앤드루 베벨보다 실제로 앤드루가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그녀가, 소설에서 남편이 번 돈만큼 많은 사회적 기부를 이뤄냈다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무정부주의자와 금융 자본가의 대립을 넘어선 어떤 대안을 작가가 그려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무리겠지? 아니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정도나 될까? 그나저나 작가가 소설에서 뭘 말하려는 걸까? 실체보다 허상 혹은 그 믿음? 구축된 신화는 허물어지지 않아야 한다? 내용을 따라잡느라 다 읽고 나서 질문이 시작되다니. 어쨌거나 값진 소설이다.


* 책은 「채권」, 「나의 인생」, 「회고록을 기억하며」,「선물」, 이렇게 4개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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