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문 May 04. 2024

익숙하지 않은, 익숙해질 것 같은...

윌리엄 트레버(2016). 여름의 끝. 한겨레출판.

여름의 끝엔 뭐가 있을까? 여름 다음 계절이 가을인 건 알겠는데, 그 계절의 끝이라니. 그냥 여름 끝 아니던가? 가을의 끝이나 겨울의 끝이라고 해도 운율은 같지만 여름 하면 좀 다르게 와닿는 건 전적으로 작가들이 만들어낸 업적만은 아니다. 


사람에게 여름이란? 그렇다. 그렇게 말하면 좀 달라진다. 소설의 원제는 '사랑과 여름'이다. 어딘가 익숙한 설정. 나이 81세의 작가에게 여름이란? 더불어 사랑까지? 익숙하다고 느낀 건 계절 '여름'을 말한 몇몇 소설 때문이다. 이디스 워튼(2020)이 쓴 소설 《여름》이나 김애란(2017)의 《바깥은 여름》, 여기에 조해진(2020)의 《여름을 지나가다》까지. 


우리는 지구라는 하나의 위성에 같이 살다 보니 느끼는 정서란 것이 어떨 때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외계인이 느끼는 계절감을 누가 설명해 줬으면 좋으련만. 굳이 여름을 정리해 보면 어떤 절정, 혹은 아쉬움, 미련이라고 해도 될 듯한 건 사람의 인생을 계절과 비교를 하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어느덧 가을이다, 라고 하면 나이가 지긋한 정도를 예상할 텐데, 살아온 이 작가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그의 계절감으로는 사시사철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로 살아가면 괜찮을 것 같은 게 시대와 세월을 넘나들 수 있으니 실제 나이를 잊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익숙하지 않은 건, 소설을 읽으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뿐만 아니라 1950년대의 아일랜드를 명확히 예측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살아가는 것처럼, 굳이 차이를 들라면 우리에겐 엄청 많은 일들이 매일 일어난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정도의 차이? 그럼 큰 차이?


시골 촌구석 아직 문명이란 이기가 이들 삶을 휩쓸지 않을 때 조용한 마을에 조응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일상의 퍼덕거림은 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니 그곳에서도 사랑이란 꽃이 피어 열매를 맺기도 할 테고, 반대로 열매를 맺기 전에 꽃이 졌을 수도 있겠다. 시대 때문에 시간도 느리게 흘러서 그런지 소설 내용도 잔잔하게 흐른다. 어쩌다 나른하고 졸리는 듯한 느낌이 전체 소설의 정서이지만, 이곳 이들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나름 상처와 아픔도 묻어난다. 그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누군가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소설 전개가 딱히 극적일 것이 없어서인지 이들 두 연인이 맺는 관계라는 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갸우뚱하지만 이것이 바로 이 소설 최고의 매력이다. 마치 사랑이 뭔지를 알려주는 듯한 느낌. 여기에 주요 등장인물도 극히 주인공답지 않은, 그럼에도 익숙할 것 같은 아니면 익숙해져야 할 것 같은 이유는 우리는 모두 늙는다는 것이다. 각자의 환경에 따라 처한 계절이 달라질 것 같지만 생각을 달리해보니 조만간 여름이란 뜨거운 열기를 벗어나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서 서성이 일 때 감히 알 것 같다. 그 여름의 끝을 말이다. 


농부 딜러핸은 평생 후회와 회한으로 살 것 같은 남자다. 자기 실수로 자기 아내와 아이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수녀원에서 가정부로 엘리를 보내는데, 고아로 자란 엘리는 속정이 깊고 과묵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이때도 엘리는 남자에게 끌린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이웃 청년 플로리언이 자전거를 타고 이곳에 방문해서 우연히 마주친다. 짧은 대화가 오가고. 사진을 찍으러 온 청년과 우연한 만남은 파도가 되어 그녀에게 몰아친다. 이런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처음 겪는 동요. 


플로리언도 엘리가 가진 고요함과 그녀에 대한 연민에 끌리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방향을 정한 대상이 있다. 여기서 더 나가면 그냥 불륜 소설이 될 텐데, 이런 전개가 익숙하지 않은 거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익숙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남녀 간에 넘치는 사랑을 꼭 육체적 관계로 드러내는 상투적인 문법이 맞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건 소설에서 나오는 몇 안 되는 주인공 중 한 명인 코널티라는 여성의 역할이다. 이미 유부남과 뜨거운 관계를 맺고, 그로 인해 애를 낙태하게 된. 이를 알고 있는 자기 엄마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다 자기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는 여자. 소설은 이 여자 엄마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코널티의 시선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건 그 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엘리와 플로리언의 관계를 눈치채고 안타까움으로 그들을 지켜본다. 누구든 겪는 그 여름, 그것이 뿜는 열기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것을 굳이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이런 시선으로 그들 관계를 쫓게 되는데, 이것이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곧 익숙해질 것 같은 때쯤 되면 소설은 곧 결말로 나아간다. 


별 특별할 것 없는 결말이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애잔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아마 윌리엄 트레버 소설인 것 같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으면서 살다 보면 그렇지 산다는 것은 말이야,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것이 익숙해질 것 같다는 것이 어쩌면 내가 여름의 끝에 도달했기 때문인가 싶다.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일 수 있겠다..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눈을 뜨면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빈 벽난로 위의 성화,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자신의 옷이 지금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부엌에서도, 마당에서도,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 테고, 레이번 스토브에 넣을 무연탄을 부엌으로 옮길 때도, 교유기를 끓일 때도, 암탉에게 모이를 줄 때나 토탄을 쌓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밀드레드가 살았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