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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May 19. 2024

살면서 최악을 피하는 방법

클레어 키건(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다산책방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최악의 일들이 지나갔는지도, 아니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만감까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된다. 보통 최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은 뭔가를 한 후 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그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최악이라고 생각할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텐데'가 아니라, '뭔가 했으니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라니.' 이것을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 책이 주는 가치는 충분했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우린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경계를 넘나들지 말지 고민하면서 사는지, 아니면 그저 고민 없이 사는지.  


"뭔가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그것이 뭐가 되었든 그것이 평생 살아가면서 최악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다. 글쓴이가 아둔하니 당연한 거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린 어쩌면 다들 최악의 순간들을 넘겼을 거라는, 그렇게 위안받고 싶었다. 최선을 다했는지, 결과가 최대였는지 그건 다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경계를 넘어서면 자기에게 불행이 닥친다는 걸 뻔히 알면서 감히 그 선을 넘는 이 얼마나 될까? 이책의 작가가 멈춰 선 그 자리에 당신이나 나나 그곳에 있는 것이다. 발을 들어 경계를 넘어설지 말지 선택은 당신이 하고 결과도 당신이 받아들여야 하는것 조차 회피하고 싶지만 말이다.


빌 펄롱. 여기 그 선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 후과가 어떨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선택을 했으니 최악은 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면해진 것이라면 좋으련만..... 쇠락해 가는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로스에 딸 다섯을 둔 평범한 아버지. 1985년 아일랜드는 대게 실업과 빈곤이란 어두운 터널 속에 있던 시기. 넉넉하지는 않지만 석탄을 팔면서 가정을 꾸릴 때 주변엔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과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견되는 세상이 아니라도,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모든 걸 잃는 일"이란 걸 자라면서 체득했었다. 그는 고아였으니까. 미시즈 윌슨이란 자애로운 이가 아니었다면 그를 낳아준 엄마도 결국 '그곳' 막달레나 세탁소에 가고 말았을 텐데, 그 펄롱이 또 다른 미시즈 윌슨이 된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직업과 딸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음에 안도하고 따뜻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그 평온한 일상이 한순간 날아갈 수 있음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고민의 순간은 결국 오고야 말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석탄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의 한 창고에서 세라를 발견한 것이다. 그곳은 1996년에야 없어진 시설 중 하나로, 소외받은 이들을 구제해야 할 그곳에서 은폐와 감금과 강제 노역이 벌어졌다는. 18세기부터 운영된 그곳에서 없어진 마지막 1996년부터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잔혹한 인권유린이 벌어진 곳. 작가의 질문은 그곳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최악을 맞이할지 최악을 넘길지.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죄상을 목격한 아버지가 침묵을 한다면 그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은 어떤 심정일까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소설.


대게가 그렇듯이 우린 이걸 판단할 줄 알면서도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겐 막달레나 세탁소는 금기가 되니, 금기기에 침묵을 하는 배경엔 정부와 수녀원이 "다 한통속"이었기 때문이지만. 이건 부조리라도 이걸 부조리라고 느끼고 불안해지는 순간 당신은 경계에 서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최악을 맞이할지 최악이 지나가게 할지. 이 책이 주는 백미는 당시 정부의 묵인하에 일부 수녀원이 소외받은 이들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다. 위험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아주 평범한 이들이 마주친, 선택을 하거나 하지 않는 그 경계에선 사람들을 주목했다. 그걸 이렇게 짧은 소설 안에서 다 녹여냈다는. 도대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을 거대한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는 작가의 역량이라니. 


경제적 어려움에 지친 소도시 뉴로스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사람들은 누군가 받는 고통엔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불운이 나를 비켜가길 빌면서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준비하는 그들이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음은 분명 비극처럼 보이지만, 펄롱에 의해 구원된 세라와 같이 걷는 그들의 앞날에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칠 줄 알면서도 그녀보다 자기 삶은 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펄롱이야말로 신의 자식이 아니던가! 신께 다가가는 시설에서 벌어진 그 불행이 과연 신의 뜻이었는지, 그걸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볼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펄롱처럼 최악을 맞이하지 않는 것이 우선일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나나 당신이나 멈칫 거리는 것을 보니, 우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사소하지 않게 만드는 특기가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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