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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May 21. 2024

노르웨이에  가고 싶다...

욘 포세(2019). 아침 그리고 저녁. 문학동네

노르웨이에 가고 싶다. 작가도 나고 자란 곳.

사는 것과  죽는다는 것. 이런 어려운 질문 말고 그냥 노르웨이에 가고 싶다. 아침이 기대와 설렘만으로 맞이할 수 없듯이 저녁도 항상 피곤과 절망만으로 보낼 수 없지 않은가.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그것이 반복되는 걸 알더라도 어느 하나를  의도해서 받아들일 수 있던가. 때론 어쩔 수 없이 살기도 하는데, 하루 온종일 사는 걸 의식하면서 살 수 없듯이 아침도 저녁도 그런 것 같다. 그게 삶과 죽음을 의미해도 말이다.


내게 노르웨이 하면 《노르웨이 숲》을 쓴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그가 노르웨이란 지명을 더 세상에 알리기 전에도, 바이킹이라던가 오로라던가 아니면 그 유명한 피오르드 지형 때문에 알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막연히 가보고 싶었던 곳. 굳이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뉴질랜드의 밀퍼드사운드의 피오르드 지형과 쌍벽을 이룰 것 같은 곳.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라서 물가가 싸야 하거늘, 반대로 높은 소비자물가 때문에 여행을 망설이게 하는. 겨울엔 아주 추울 것 같아 '겨울 왕국'이란 단어가 매력적이라도 그 시기엔  가고 싶지 않지만. 성하로 지친 8월에 가면 뭔가 시원한 북극해 바람이 불 것 같은 그곳 말이다.


아침은 어부 올라이의 아내 마르타가 출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르웨이 해안가 어느 마을. 그가 둘째를 가졌는데 이름은 요한네스. 할아버지 이름으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요한네스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누구도 모르지만 그는 그의 아버지 올라이처럼 살아갈 것이다. 아침이니까. 그것도 출산을 상징하는 아침이 그냥 아침이던가. 올라이가 지켜보는 아침은 남자가 출산을 지켜볼 수 없는 전통에 따라 밖에서 마음을 졸여가며 지켜본다. 우리도 누군가 그렇게 우리를 지켜봤을 거다. 초조하게. 모든 우리 삶에 마침표가 있을 수 없듯이,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이 마치 누구든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 같다. 누군가 사는 것. 살아가는 것. 내가 없어도 이어지는, 그건 끊임없으니까. 마침표가 없는 건 당연한 것이다.


저녁은 아버지 올라이처럼 어부로 평생을 보낸 요한네스가 서로 머리를 깎아주며 인생을 함께한 친구 페테르와 산책을 통해, 먼저 마침표를 찍은 아내 에르나가 남긴 빨래통을 보며 그의 곁에 아무도 없음을 묘사한다. 떠난 것이다. 이때, 누가 먼저 떠났고 누가 남았는지 누가 좀 더 살았는지 그건 의미가 없다. 요한네스가 지금까지 그랬듯 그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마침표 없이 살아왔을 터.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또한 이제 소설 속에서 사라져야 할 테니. 저녁이니까. 그렇게 집에 오니 아내 에르나가 평소처럼 커피를 내놓고, 요한네스는 막내딸 싱네를 따라가다가 비로소 자기 자신도 그곳에 없음을 알게 된다. 덤덤하게. 그런 그를 위해 친구 페테르가 자기 고깃배를 타고 다른 세상으로 같이 가자고......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p. 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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