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문 Jun 04. 2024

집 나와 개고생 하면 보람이라도...

윌리엄 트레버(2021).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펠리시아가 아직도 영국 어딘가 떠돌 것 같다...... 

그를 만들어낸 작가 윌리엄 트레버는 2016년 11월 88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야말로 진짜 여정을 떠난 것 같다.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고 말하면 작가에게 누가 될 것 같아서 저쪽 세상 어딘가로 떠난 여행을 지금도 지속할 것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역시나 여정은 지속되는 것이 맞다. 이걸 멈추면,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없다면 뭐든지 끝날 것 같은 단어. 여행 말고 여정!


이건 분명 여행이란 단어가 줄 수 없는 묵직함을 준다. 소설이 그랬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소설은 그냥 어린 처녀가 결혼식에서 만난 남자  조니와 사랑에 빠져 임신하고, 그녀는 잠시 즐기다 떠난 남자를 사랑이라 생각해서 영국으로 찾아 떠나서 벌어진 얘기이다. 이런 걸 굳이 소설로 썼을까 해서 읽다 보니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만나게 된다.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정서와 그때 시대상을 보여주는 노숙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머무는 지점. 작가도 결국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니 작가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문장들이 허투루 쓰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그것이 같은 인간이기에 느끼는 제한된 정서지만, 와닿는 보편성 때문에 소설을 읽게 된다. 


지리적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아일랜드의 한 소설가가 쓴 소설이 내게 들어와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삶이 주는 엄청난 고통을 묘사하지도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즐기다 애까지 갖고, 결국엔 임신중절까지 하는 어느 멍청한(?) 여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소설의 가치는 폭삭 망했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펠리시아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가족에 품에 안겨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과는 아주 다른 결과. 여기 힐디치라는 희대의 살인마한테 넘어가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까지도 갖게 했으니, 소설은 우리가 아는 성공 공식과는 다르다. 


그저 즐긴 관계를 사랑이라 여겨 남자를 찾아온 여성이 소설 도입부에 환전소에서 아일랜드 화폐를 영국 돈으로 바꾸는데, 이때 돈을 환전하는 의미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지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여전히 하류 민족으로 취급받는 영국으로  어린 소녀가 그것도 임신한 소녀가 노숙자 생활과 같은 거친 세상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 전환은 아주 비극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낙관적이지도 않다. 우리 누군가의 삶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항상 즐거움만이 아닌, 그렇다고 슬픔만으로 가득 차지도 않은. 40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아일랜드인이 벌여온 독립을 위한 여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지속됨을 상징하는 것처럼, 펠리시아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애초 그저 즐기다 영국으로 가 군대에 입대한 조니는 공장에서 일한다는 거짓말과 연락할 어떤 주소도 남기지 않고 떠났고, 그를 찾아 영국에 온 펠리시아는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결국에는 그 위험성을 알게 되는, 힐디치란 남자에 어쩔 수 없이  의지하게 된다. 힐디치는 펠리시아가 노숙인이 되게끔 그녀의 돈을 훔치고, 조니와의 만남을 방해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그녀에게 흘리면서, 자기에게 더 의지하게 만든다. 소설을 읽을수록 무기력하게 보이는 펠리시아에게 더 몰입하게 되는 것은, 조니를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서서히 깨지는 과정을 넘어서, 이건 우리 모두 삶의 여정에 들어섰다면 의지할 곳 찾아 헤매는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지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쩜 그 어딘가에도 의지할 누군가는 바로 당신뿐이라는 암시 같기도 해서.  


소설은 어느덧 펠리시아를 집안에 들이고, 다른 여자들을 죽일 때 보여줬던 모습들과는 다른 힐디치가, 정신적 불안감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에도 마을은 여전히 조용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까지 묘사된다.  펠리시아의 여정이 지속된다는 것은 집 나와 많은 고생을 이어감을 의미하기에 좀 더 개운한 결과, 영화는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던데, 을 원하게 되지만. 그녀가 개고생 한 보람만큼은 느꼈으면 하는 바람을 매몰차게 거부하며, 더 나아가 힐디치라는 정신이상 살인마라고 하더라도, 그의 여정조차 특별할 것 없고 주목도 받지 못한다. 


"한때는 생경했던 그런 생각이 펠리시아의 하루를 채운다.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으며,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그럼에도 생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혼자서, 더 이상은 아이도 소녀도 아닌 것을 감사한 일이라 굳게 믿으며, 그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돌아다닌다."(p.320).


매거진의 이전글 노르웨이에 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