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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Jun 10. 2024

사라지고 남는 것.

앤드루 포터(2024). 사라진 것들. 문학동네


슬픔, 아쉬움, 미련... 그다음은 무엇일까? 혹여 이런 감정들이 다 떠나도 상실, 소외, 쓸쓸함이 남는 것일까? 사라지는 것도 아쉽지만 남는 것도 그것이 뭐든 아쉬울 것 같다. 


이런 감정들을 담긴 노래 15곡을 계속 듣는다면 그날 하루 종일 멜랑꼴리에 빠져 한강변을 찾을까 싶다가...... 그러면 안 되지만. 지칠 것 같긴 하다. 비슷한 음률의 곡을 계속 듣는다는 것은. 그럼에도 소설은 뭔가 다른 것 같다. 처음 가져본 생각이었다. 이 소설만 그럴 수 있겠다는. 아니, 이 작가만 그럴 거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음악과는 다른 이 느낌! 이래서 소설이 음악과 다른 건 알겠는데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속히 읽어야겠다는 의무감을 갖게 만든 작가 앤드루 포터. 그가 전작을 세상에 내놓고 15년이 지난 후 다시 단편 15편을 가지고 왔다. 겨우 1년에 1편 정도 단편을 쓰나 싶지만, 설마 그렇겠어라고 생각하더라도, 너무 짧은 단편도 있기에,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내내 아니 소설을 읽은 후라도 허우적거렸다. 우리네 사는 모습들이 분명 다를 텐데, 그걸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히 그걸 읽은 그쪽 세계 사람들도 마음 한 곳엔 나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테니. 서로 다른 문화권이지만, 읽은 사람들을 뿅 가게 만들었다는 것을, 대단한 작가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단편집.


그러고 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것이...... 굳이 단어를 찾아보니 '통찰'같다. 이 단어가 그렇게 생각이 나지 않다니.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이 느낌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음악을 듣고 우리네 인생을 통찰했다고 느끼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 어떤 대곡이라도 말이다. 이건 스토리의 힘 같은데, 이때 통찰이란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우리가 겪은 어느 것들도 영원하지 않다는. 그것이 사랑이든, 청춘이든, 열정이든, 예술이든...... 결국 사라진다는 것.


사라지기에, 사라진 것이 되기에, 그냥 사라진 것들을 들려주는데 내용에 풍덩 빠져들게 된다. 종국엔 이 작가도, 그가 쓴 그들도 사라지겠지만, 하고 말하면 분명 많이 나간 거지만 그런 느낌이 어떨지 그걸 알게 해 준다.  


〈오스틴〉 파티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난 소회. 우리들 얘기로 바꿔보면, 어느 날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갔을 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뭔가 대화가 옛날과 다르게 어긋나게 됨을, 그러나 어긋난 그 무엇을 드러내지 않고 모임에서 돌아온 적은 없는지. 딱 이 이야기다. 뭔가 달리진, 그건 다른 방향과 다른 속도로 세상을 살았기 때문인데, 이걸 작가가 반추한다. 친구들과의 대화 소재는 한 십 대 소년의 죽음에 대한 것일 뿐. 그러니 생각이 다 다를 터. 텍사스 주도 오스틴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넝쿨식물〉 오래된 물품들을 정리하다 찾은 물건이 오래전 사귄 여자친구가 남긴 그림이라면. 그것도 나이 마흔셋에 암으로 죽은. 예술을 위해 떠난 애인이 떠난 뒤 잘 먹고 잘 살지 못하고 여생을 암과 투쟁하다 죽었다는 현실을 바라보는 당신이라면.  그런 그녀 마야가 죽기 몇 달 전 네 살과 여섯 살 된 두 아이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면서 "이게 나라니 믿어지니? 내가 얼마나 평범해졌는지 봐. 그 옛날에는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라는 사진을 나중에 발견해서 읽는 주인공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라진 것들〉 여기서는 절친 대니얼이다. 그가 진짜 사라진다. 국립공원에서 트레킹을 갔다가 실종되는데, 그가 진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와 친했던 사람들, 사라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그 친구를 어떻게 슬퍼하고 어떤 희망을 품는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이건 역시나 각자 살아온 방식대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여기선 그의 여자친구 앙투와네트와 나를 통해서 주로 보여준다. 아무리 친한 친구 여자친구라도 며칠을 함께 보내며 사라진 친구 유품을 하나하나 정리하면 뭔가 섬싱이 일어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깨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난, 역시나 속물!


〈담배〉 이거야말로 담배 피우다 다 필 때까지처럼 짧은 소설?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첼로〉 이번엔 아내 내털리의 재능. 첼리스트이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아내가 파킨슨병에 걸렸다면. 그런 아내를 보는 남편은 읊조린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연주했던 대로.  아이들이 방에서 잠든 늦은 밤에 바로 이 스튜디오에 나와 무수히 했던 대로, 그렇게 진정으로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인벡〉 이번엔 리베카와 데이비드.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친구들 따라 라인벡에 온 얘기다. 오스틴처럼 라인벡 역시 도시 이름이고. 이런 관계가 가능할까 싶지만 친구 따라 강남도 가는데. 이들 친구들이 오스틴 이주를 계획하는데, 그럼 라인벡에서 보내는 그들의 마지막 날들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잠자리에 들기 전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남은 리베카와 데이비드의 메시지. 그걸 지금 확인할 수도 있고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있지만, 그냥 지워버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때 드는 생각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읽고 나서 든 다른 생각.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세상도 사라질까? 내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나만 사라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것들 목록 속엔 내 이름도 남겠지만. 이걸 알기 위해 소설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읽다보니 궁금해진 것 하나 더. 부모로서 책임을 말한 〈숨을 쉬어〉나 사라진 단골 식당을 아쉬워한 〈포솔레〉 등등을 읽어보면서 작가가 살고 있는 그곳이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나 사는 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 생각도 남긴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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