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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Aug 02. 2024

결코,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책.

셸리 리드(2024). 흐르는 강물처럼. 다산책방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몇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지난 여행을 정리하는 와중에 습관처럼 책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읽었더니 어떤 책은 재미를, 어떤 책은 회의를, 어떤 책은 역시 이거야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재미있던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라는 소설이었고, 회의를 준 책은 임경선의 《다 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거야 했던 책은 셸리 리드(2024)의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 Go As A River》이었다. 동명의 영화(A River Runs Through It) 흐르는 강물처럼 때문에 책 제목을 분명히 이렇게 정했을 거야 하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동명의 영화 원제목보다 소설 내용에 더 가깝게 번역한 것 같았다.


이 말인즉, 소설이 좋았다. 그래서 감히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책이 되었다. 나만 알고 나만 읽었으면 하는 책. 그런데, 어쩌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그것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을. 알려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책. 그것도 미국 작가의 책을 무슨 수로 선별해서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알 수 있을까? 남들이 그러니까, 남들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말은. 남들도 그렇게 산다는 것, 크게 보면 사람이 어디서 살 건 사는 것이 역시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걸 굳이 깨달음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은 깨달았다는 그 깨달음의 실체가 실상은 그걸 따지고 보면 별것 없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들었다.


어쩜, 이런 것 같다. 산다는 것이. 별거 없는 것 같기에. 그런 연유로 해서 우린 자꾸만 '흐르는 강물처럼'이라고 되뇌는지 모른다. 유독, 이런 문장을 자주 쓰는 이유가 사는 것에 대해 서양인들이라고 별다르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함께였다.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유수부쟁선 (流水不爭先)이란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꼭 강이 아니어도 땅도 그렇지 않던가! "내가 산에서 얻은 가르침이 있다면땅은 지속된다는 것필요한 때가 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고가능할 때 제 모습을 찾고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


내시 복숭아 과수원 집 딸 토리(빅토리아)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윌과 사랑에 빠진다. 그렇지! 필연적으로 만나겠는가. 강처럼 살아가라는데. 소설 속에선 윌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인디언이란 사실만. 그런 그가 어느 날 죽은 채 발견된다. 일찍이 엄마와 이모와 친척 오빠의 죽음이 뭔지, 상실이 뭔지 경험한 그녀에게 첫사랑이자 끝 사랑 윌까지 세상에 없다. 그를 죽인 건 자기 동생 세스의 짓이란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건, 그녀가 나고 자란 콜로라도 주 아이올라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남을 배척하고 죽일 수 있는 그곳을 그녀는 당연히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어느 날 뱃속엔 풋사랑의 결실, 베이브 블루가 자라고 있어, 집을 떠나 낯설고 외진 곳, 윌과의 사랑이 남아있는 산막에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살리고자 한 행동이 다시 아이를 다시 죽일 수도 있어, 토리는 다시 산막을 벗어난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이미 가장 위험한 허들을 넘은 엄마가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 토리는 제대로 먹지 못한 자기 아들을 숲에 놀러 온 젊은 엄마에게 아이를 맡긴다. 우연히 그 엄마가 자기애한테 젖을 물리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 엄마가 젊고 건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하늘에 운명을 맡긴 체 그들이 몰고 온 차에 자기 아들을 남기면서, 그녀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기 전 윌을 만나게 해준 루비 엘리스를 찾아간다. 


그녀는 마을에서 엄청 심한 왕따를 당해왔지만, 그녀 또한 막연히 그녀를 경계해 왔지만, 윌을 만나게 해준 인연으로 아픔을 간직한 채 사는 그녀를 이해한 후 그녀를 찾아간 것이다. 엘리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토리를 묵묵히 받아주고 지켜봐준다. 루비 엘리스 덕분에 몸과 마음을 회복한 후 집으로 돌아오니, 원수 그 자체인 동생과 전쟁으로 불구가 되고 아내까지 잃었던 이모부마저 집을 떠난 후 남은 건 말없이 내시 복숭아를 최고의 복숭아로 만들어낸 아버지뿐. 대화란 거의 없이 아버지를 지켜보니 아버지에게 남은 나날들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런 아버지마저 흐르는 강물처럼,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면서 세상을 뜬다.


마침, 아이올라 지역이 정부의 계획에 따라 댐이 만들 계획으로 수몰될 예정이 되자 그녀는 과감하게 고향 땅을 정부에 넘기고 고향을 떠난다.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도 아버지가 애지중지 최고로 키운 복숭아나무만큼은 지키고자 나무들을 이주시키면서 근처 마을에 성공적으로 나무들과 함께 정착한다. 상실과 아픔을 꿋꿋하게 버텨낸 건 자기가 남에게 맡긴 아들이 어디선가 살아있음을 기원하면서, 매년 한번 씩 자기가 아들을 버렸던 숲속 바위 위에 돌을 올려놓으며 아들을 기억하는 원동력으로 버텨왔다. 


상실에 대한 아픔을 그런 방식으로 치유하던 그녀가 다시 그곳을 찾아갔던 어느 날, 바위 위엔 그녀가 올려놓았던 돌 20개 말고 낯선 비닐봉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건 잉가 테이트라는 여자가 남겨 놓은 편지였다. 거기엔 토리가 아닌 잉가라는 여성이 살아온 삶이 자기 아들 루카스(토리의 아들이기도 한)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녀가 그날 남편 폴과 그곳에 왜 갔는지, 자기가 젖을 먹여 키운 맥스와 루카스가 어떻게 자랐는지, 베트남 전쟁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기른 아들 루카스가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자기 욕심 때문에 낳은 엄마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한 이유라든지. 이렇게 되면 소설의 결론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책을 읽는 이들을 행복하게 할지 정해진 것 아닐까?


역시나 잘 엮인 스토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러니 책을 잡자마자 단숨에 읽었지만, 결코 남들이 이 책을 많이 몰랐으면 했던 이유를 밝히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작가가 소설을 잘나고 멋진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만들기 위해 쓴 것 같지 않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나 할까? 작가의 나이와 삶과 세상을 보는 눈. 특히, 그녀가 얼마나 소외되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듯한 눈길을 보내는지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이건 단순히 주인공 토리의 삶을 돋보이려 계획한 작업 같지가 않다. 


두 번째는 그녀가 소재로 쓴 수몰지역과 댐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당연히 그녀가 대학에서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30년간 가르쳐온 힘은 그녀의 고향 콜로라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이건 그녀의 인성에 토대를 두었기 때문이지만. 세 번째는 역경과 고난에 찬 주인공이 어떻게 삶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는지 그걸 억지스럽지 않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사는 것 그 자체가 특정한 누구에게만 특별하지 않기에 더 소중한 것 같은 느낌을 잘 살려냈다. 흐르는 강물 속에서 버겁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결코 특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값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말이다.


그런데 이게 이유가 될까? 보다 솔직히 말하면 말이다. 결론이 어떻게 날까, 어떻게 끝났으면 하는 바람대로 끝이 날 것 같더라도, 우리네 삶이 이래야지 소설도 그래야지 하는 생각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눈가에. 이런 건 나 혼자만 누리고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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