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문 Jul 18. 2024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16:50

30.

아뿔싸! 전광판을 잘못 보고 있었다. 도착(arrivals) 전광판을 보다니. 난 출발(departures)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아니,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을 봐야 했다.  출발시간은 16:50분이었다. 테르미니역 도착시간은 16:55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을 향해 떠나는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는 16:50분에 떠나는 거였다. 로마를 떠나면서 도착시간이 무슨 의미가?


사연은 이랬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테르미니역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역에서 어떻게 공항에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타고 공항에 가는 것까지만 알아놓고 정작 어디서 표를 사는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든 생각. 여긴 기차역이니까 이곳에서 타야 하면 결국 표를 사야 하는 거군! 그래서 여러 자판기 중 한 곳 앞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다. 여기서 또 하나 실수. 기차가 몇 분마다 떠나는지 아무 생각 없이 표를 구매하고자 했는데.


어라! 내 앞에 있던 두 모녀가 기계 앞에서 계속 헤매고 있다. 시간은 충분한지 어떤지 보다 더위 때문에 답답하던 차, 미안했던지 더 이상 시도를 멈추고 자판기를 나한테 양보를 한다. 그후 더딘 기계에서 어찌어찌해서 표까지 구하는 것은 좋았다. 그래놓고 자판기를 떠나 그럼 몇 시에 떠나지 하고 전광판 앞에 다가갔었다. 떠나는 기차 시간을 확인하러. 기차표는 06:50분. 그런데, 뇌가 멈추듯이 사고도 멈췄는지 도착 전광판 앞에 서있었다. 떠나는 시간까지는 확인을 해놓고 전광판을 보니 06:53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도착 시간을 나타내는 전광판인지 모르고.


어떻게 알고 그녀는, 지금도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게 뭐라고 얘기했던 것일까? 로마 테르미니 기차역에서 나한테 뭐라고 소리쳤던 여성.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암튼,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엔 16:55분이라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신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 같았다. 그게 그녀였다. 그렇게 믿는다. 직감으로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출발 전광판을 보니 16:50분 불이 들어와 있었다. 깜박거리는 빨간 불.


이 말인즉, 플랫폼이 정해져 사람들이 자기 기차에 타고 있다는 말이었다. 시간은 50분을 넘겼는데, 그냥 뛰었다. 베니스에서 피렌체로 출발할 때도 그러더니. 배낭을 메고 냅다 뛰었다. 다행인지 내가 타야 했던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는 날 버리지 않았다. 기차 맨 뒤 칸 쪽에 승무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뭐라 그랬는데 안심하라는 것 같았다. 참고로 이탈리아 베니스나 피렌체, 로마 등에서는 전광판에 출발 플랫폼이 정해져야 기차를 탈 수 있다. 표를 산 후 바로 알 수 있지 않다. 기다려야 한다. 대략 떠나는 시간 20분 전 정도면 내가 타야 할 플랫폼이 나타난다고 했던 것 같다. 성격 급한 우리네에겐 맞지 않는데, 여긴 로마다. 로마!


이건 나중에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그랬다. 체크인할 때 게이트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출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안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게이트가 번호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때 그걸 게이트 23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역이건 공항이건 게이트가 늦게 정해지다니. 기차역에 플랫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기차 운행 횟수가 많다는 의미라는 것은 알겠지만.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온 내가 보기엔 시스템의 차이만으로는 좀 부족했다. 흠, 시스템이 후진 것일까??


생각해 보면, 기차를 탈 사람이 표를 들고 도착 시간표를 보고 있겠는가? 차에서 검표를 했으면 그 표는 사표이거늘, 누가 소중하게 들고 전광판을 보고 있겠는가. 이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땐 정말 정신이 없었다. 결국, 난 탈 없이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쓰고 있는 게지.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면, 그 기차를 놓쳐도 한국에 오긴 왔을 것 같았다. 그건, 기차역에서 공항까지 30분 간격인 기차를 놓친다고 가정해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해 보니 한국 오는 비행기 이코노미 체크인 줄이 엄청 길었고, 배낭을 맡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누군 당당히 이코노미 석을 타면서 이코노미 줄이 아니라 비즈니스 줄에 서서 체크인을 했는데, 이렇다면 굳이 구분은 또 왜 했는지.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 공항 피우미치노까지 40분 정도 걸렸다. 이래서 익스프레스였나? 내가 탄 기차 이름이 왜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였을까? 오는 내내 궁금했던 건 돌아와서 알게 되었다. 역시나 우리처럼 공항에 오는 방법이 버스와 기차가 대중적인데, 익스프레스란 말은 빨리 간다는 의미였을 텐데, 10분 정도 빨리 가는 걸 익스프레스라고 이름을 붙이다니.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이건 중간에 쉬지 않고 간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 10분 정도 더 걸리고 중간에 4번 더 정차하는 트레노 레지오날레라는 완행열차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격은 8유로. 익스프레스 가격은 익스프레스라서 14유로인가? 돈 아낀다고 굳이 이걸 이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건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기차를 탄 후 검표원이 와서 검표를 할 때까지 약간 긴장하다가, 검표원이 QR카드를 확인한 후 진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가 잘못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과 그럴 리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차역을 떠나 공항까지 객실 모니터에 도착 시간표가 표시되었는데, 도착 시간은 정확했다. 이래서 익스프레스이었을까?


출국 수속 후 공항 안전구역으로 들어와서 역시나 게이트가 뜰 때까지 빈둥거리다 비행기에 탔을 때 잠시 안도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떠나는 날 로마 바실리카 성당 두 곳과 세 분수 수도원, 스칼라 산타(성혈 계단)까지 더운 날씨에 쉬지 않고 돌아본 것이, 미련을 남기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그렇게 탄 비행기이라서 금방 이룩할 줄 알았는데 쉽게 이룩하지 않았다. 기장이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뭐라고 했었는데,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뜨지 않은 비행기에 지쳐있을 때 다시 기장이 뭐라고 했다. 관제탑 지시로 1시간 정도 활주로에서 대기했는데, 다행히 상황이 좋아져 30분 정도 대기하고 출발한다는 목소리였다.


만석!

게이트가 23이 아니었다. 낡은 386 두뇌는 여행 내내 말썽을 일으켰다.

게이트는 23번이 아니었다. 24번 게이트. 그랬었다. 그 번호는 한국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떠날 때 게이트 번호였다. 23번이나 24번이나 이런 걸 틀려도 비행기를 타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차이라서 다행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번호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제네바 공항으로 갈 때도 같은 게이트 번호여서 신기하군 하고 생각했었던 번호였는데, 그 공항에서 게이트는 금방 21번으로 바뀌었었다.  


로마를 떠나는 비행기엔 한국으로 가는 여객기엔 정말 사람이 많았다. 나처럼 16 리터짜리 배낭을 배고 비행기 안으로 사뿐사뿐 가볍게 들어온 이는 나밖에 없는 듯했다. 다들 쇼핑백과 선물인 듯 가득한 짐을 들고 꾸역꾸역 밀려드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피곤한 것이다. 다들 꿈나라에 들었던 것 같다. 나도 어느 순간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깼으니까.


이렇게 27일간의 고행(?)이 끝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