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문 Oct 09. 2024

평범이 들에게 찬사를!

김기태(2024).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학동네

인터내셔널가를 찾아들었다. 작가 덕분인데, 노래를 듣다 보니 이 노래를 듣고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했는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뭔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소설 속에서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좋았다. 소설이라도.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작가 김기태가 평범하지 않은, 이미 유명해진 것이 유일한 흠이 될 것 같다. 작가가 누군가 궁금해서 잠시 여기저기 뒤져보니 이 책을 펴낼 때 자기가 쓴 단편소설들을 정교하게 순서를 정했다고 했었다. 그렇다. 작가는 다 생각이 있구나. 전체가 연결된 것 같은 단편집.


작가가 글 안에서 인용하는 지난 혹은 현재 유행하는 노래와 책과 현실에 대한 인식이 평범하지 않다. 현실에 접착제로 단단히 붙여놓은 신발을 신은 덕인지 단편들 곳곳에서 '지금'이 묻어난다. 작가가 젊은것이다. 그러니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시대를 앞서지는 못해도 시대가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가 소설에서 말하듯이 "땅에 붙인 두 발바닥. 그것이 시작이다." 소설이 그랬다. 


〈세상 모든 바다〉는 걸그룹이다. 통칭 세모바라 불리는. 이들이 잠실에서 공연을 하기에 하쿠와 영록은 그곳에 간다. 티켓도 없으면서. 그곳 십삼만 명 중의 한 명이 된다. 하쿠가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오해와 저 멀리 떨어진 해진에서 올라온 영록은 그날 그곳에 따로 또 같이 있었지만. 영록은 죽는다. 그는 스타디움 밖 삼만 명 중에서 죽은 아홉 명 중 한 명이 된다. 공연을 끝내고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게릴라 라이브를 한다는 하쿠의 말 때문은 아니지만 결국 누군가 외친 gun이라는 말과 총소리 음향효과로 우발적인 비극이 발생했다.  하쿠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는 해진으로 간다.  



〈롤링 선더 러브〉는 작가가 얼마나 현실에 밀착해 있는지 이를 리얼리즘이라는 단어 없어도 굳건히 알 수 있다. 솔로 농장? 짝짓기 프로그램에 맹희가 출연한다. TV에서 방영된 많은 프로그램 덕분에 출연진 모두 정말 짝을 많이 맺었는지 관심 밖이지만,  만원 지하철에서 누군가 팔을 거쳤으면 할 정도로 작은 여자 맹희. 꼭 그녀 때문이 아니라도 이런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많은 악플들 오가는지 알만하지 않을까? 이렇게 맛깔나게 멋쩍은 짝짓기를 재밌게 그려내다니. 다행히 19기 출연자 그녀는 14기 출연자 순무와 만남을 이어가는데. 지금 그들은 결혼했을까?



〈전조등〉 가벼운 사고로 한쪽 전조등이 깨진 자동차로 인생이란 험난한 길을 꿋꿋이 나간다는 건, 별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랬다. 그렇게 누군가는 살아간다. 결혼이란 "돈을 모으려면 꼭 해야 하지만 돈을 모아 야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죽음만큼이나 미루면 좋지만 사람 구실을 하려면 하긴 해야 하니, " 지인 동생의 지인 전화번호로 연락한 그녀와 결혼에 다다른 그 남자가 보여주는 평범하고 성공한 것 같은 단순 명료 인생기. 그럼에도 여전히 던져지는 질문. 나는 누구지?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진주와 니콜라이는 국적과 인종이 달랐으니 인터내셔널은 맞는데, 뭔가 다를 것 같은 그들 삶은 결코 남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던진다. 세상에 질문을.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고?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그럼에도)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 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 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 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냐고? (p.133~134)



〈보편 교양〉 고전 일기는 올해 처음으로 개설된 3학년 선택과목이다. 이 과목을 이끄는 나는 선생 곽이다. 나는 "교사는 감사한 직업이고, 가끔은 아주 감사한 직업이에요. 학생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라고 생각하는 겸손하고 정직한 선생이다. 그런 내가 보편적이며 전적으로 교양 과목을 개설하고 진두지휘하지만. 역시나 학교는 서울대를 몇 명 보내느냐고 평가하고 평가받고. 학생들은 이 과목을 선택했다고 해서 보편 교양을 늘리려는 건 아니고. 그중 은재만이 보편적인 교양인이 결과적으로 된다. 그건 서울대를 입학함으로 증명하고. 은재 아버지가 자본론을 읽는 자식이 선생 때문이라 의심해서 학교에 항의하는 모습은 요즘 학교 아니던가.  



〈무겁고 높은〉 100kg를 들어야 하는 송희는 오늘도 열심히 노력한다. 그녀는 역도부 학생이니까. 끼워파는 과자처럼 그녀는 기대주가 아니다. 우승자 따라 졸업하면 실업팀에 세트로 가는 학생. 역도대회에서 그녀는 역시나 100kg도 들지 못한다. 그걸 들었다고 해서 우승을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경쟁자 안경이 이미 114kg를 들었기에 승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그녀는 대회가 끝난 후에도 시도를 한다. 폐허가 된 탄광촌에서 반짝이는 건 송희 같은 학생들이 아니라 카지노 불빛뿐이지만. 그것처럼 빛나게 인생을 '무겁고 높게' 들어 올리고 싶건만. 그건 꿈이나 희망, 미래라는 단어. 송희는 취업이 잘 된다는 전문대에 들어가고 간다. 역도를 그만둔 후.  



읽다 보면 누구도 특별하지도 그저 평범한 이들에게 다가가 박수와 위로를 보내지도 않는, 그렇다고 냉소적이지 않고 따듯한 작가의 눈길은 〈로나, 우리의 별〉, 〈태엽은 12와 1/2바퀴〉, 〈팍스 아토미카〉까지 닿는다. 〈로나, 우리의 별〉에서 로나는 고등학교 1학년 신분으로 12 주간의 서바이벌에서 우승하고, 변하는 세상에 맞서 여전히 '우리는 가능하다'라고 외친다. 〈태엽은 12와 1/2바퀴〉은 딸 이름으로 지은 은혜장이 은혜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어도 달라질 것 없는 숙소에 사마귀가 찾아오는데. 그는 검은 비닐봉지를 남기면서 물컹거리는 결말로 유도한다. 그 안에 든 건 무엇이었을까? 〈팍스 아토미카〉는 핵이 만들어낸 울퉁불퉁한 세상에서 어떻게 핵을 제거할지 고민스러운데...... 어느 소설 하나 명쾌하지 않은 결말이지만 확실하고도 분명한 건, 어떻게 살 건 그 안에 사는 평범한 우리들이 명확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머랭쿠키를 먹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