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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Oct 04. 2024

나도 머랭쿠키를 먹고 싶다!

구병모(2022). 위저드 베이커리. 창비

리셋을 할까? 머랭 쿠키를 먹을까? 리셋은 알겠다. 컴퓨터를 할 때 오류가 나면 그걸 모두 없애도록 시스템을 다시 돌아가게 하거나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다. 이때 모든 건 사라지게 된다. 머랭 쿠키는? 설마 쿠키를 먹어서 시간을 돌릴 수 있을까? 위저드 제과점에서 파는 타임 리와인더 쿠키가 머랭 쿠키인데, 정말로 이 쿠키를 먹고 시간을 돌렸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는 의미는 리셋과 문맥에서는 거의 유사하다. 단, 나를 리셋하거나 리와인더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있어야 한다. 정말, 내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청소년 문학이란 말을 알고 읽어도 이런저런 생각할 것이 많아지는 소설이다. 뭔가를 선택하고, 그것이 전적으로 자의에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결국, 자명하게도 선택도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아무리 마법의 빵이라도. 그러니 신중해야 한다. 특히, 악마의 시나몬 쿠기의 경우는 말이다. 이 책은 어른을 위한 책 같다. 많이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머랭 쿠키를 더욱 찾게 될 것 같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파과》를 읽고 감동받아 작가를 찾아보니 다른 책들도 많은데, 그중에 제목이 판타지 같아 골랐다. 리셋이라고 하니 아무 감정 없는 차가움 같아 은유와 상징을 갖는 타임 리와인더 머랭 쿠키를 먹고 시간을 돌려보고 싶다. 당신이라면 어디로 갈까? 아, 그러고 보니 이건 미래로 갈 수 없다. 그렇지. 리와인드해야 하니. 


프롤로그를 읽다 보면 감탄하게 된다. 그 전개가 빠르다. 작가의 필력이 역시나 하게 되는데, 그만큼 빠르게 주인공이 되어 어떤 결론이 맘에 들지 끌려간다. 당신은 예스를 선택할 것인가. 노를 선택할 것인가. 이건 마지막에 생각하면 되고. 마법의 빵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주인공이 있다. 말더듬이다. 이렇게 된 것이 엄마가 나를 버려서인지, 엄마가 죽어서인지, 사랑이 없는 아버지 때문인지. 엄마가 없으니 아버지가 재취를 하는데 그 대상이 초등학교 배선생이다. 그녀에겐 이혼 전 가진 딸 무희가 있다. 이 양엄마가 모성애나 선생이란 직업과는 상관없이 주인공을 갈군다. 아주 현실적인 설정이다. 어느 날 무희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설정에서 엄마는 뻔히 알면서도 주인공이 그런 것으로 몰고 간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 집에서 눈칫밥만 먹던 그는 그의 유일한 도피처 빵집으로 간다.  


"빵은 지긋지긋해." 빵이 전적으로 좋아서 빵집을 들락거린 것이 아닌데, 이 빵집이 이상하다. 일반적인 빵도 팔지만 이상야릇한 빵들도 판다. 이건 마법사가 만든 빵. 마법사는 다 알고 있다.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도 다 예상한다. 그런 그가 그를 잠시 받아들이면서 이상한 빵집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 세상에서 온라인으로 들어오는 빵 주문을 담당하는데, 이 주문들이 다 마법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를 골탕 먹이게 하거나 괴롭히거나. 빵으로? 그런데 이런 주문이 맘대로 이뤄지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이러면 마법을 넘어선다. 


그러니 마법으로 비진 빵은 제약이 따른다. 신중해야 한다. 바로 이점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다. 어떤 선택이든 그것엔 책임이 따른다는. 우린 살면서 많은 좌절과 후회를 한다. 아닌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이걸 받아들이며 살아갈까? 사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이런 순간들이 청소년들이 겪는다면. 이렇기에 청소년문학상을 받은 것이지만. 교훈이 어디 갈까? 암튼 우리가 커가면서 겪었을 내지 지금도 겪는 선택과 책임이란 문제를 아름답게 마법이란 이름으로 구워 매대 위에 올려놓는다.


자! 이젠 당신 선택에 달렸다. 선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바꿀 것인가. 책에서 선택지는 yes의 경우와 no의 경우다. 전자를 선택하면 주인공을 얽매던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렇지만 추억은 사라진다. 후자를 선택하면 주인공은 소설에서 주어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추억이 남는다. 아름다웠던 위저드 베이커리에서의 생활을. 너무 단순화했나? 결과는 이러나저러나 아버지는 성추행 범이 된다. 전자에선 자기 수양딸이 아닌 다른 애를. 후자는 어쨌든 자기 딸 무희를 범한 파렴치한이 되고. 


당연히 소설은 아버지가 성추행범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위저드란 말이 들어갔으니. 희망과 꿈 아니겠는가. 아버지건은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여기에 양엄마란 설정까지. 자기 자식에게도 모질게 구는 부모가 많지만 남의 자식에게 못된 짓 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런 얘기는 그만해야겠다. 그저 소설 설정이 그렇다는 것이고. 위저드 베이커리니까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no를 선택해서 바뀐 건 없어도 새로 생긴 위저드 베이커리를 향해 달려가는 소설 속 나를 발견하지만, 한편에선 yes를 선택해서 뭔가 내 지긋지긋한 과거(?)를 싹둑 도려내고도 싶다. 둘 다 선택하고 싶다고? 이건 선택지에 없다. 굳이 이걸 선택이라 표현한다면 둘 다 선택하고 싶다고? 추억도 남고 갈등도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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