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2023). 작은 땅의 야수들. 다산책방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소설. 처음 느낌이 그랬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으려는데 밀려든다. 아련함과 아픔이. 지난 역사를 달리 표현할 길 없어 간난신고라고 하더라도 역사는 고통을 모른다. 역사는 그냥 역사일 뿐. 그걸 감내해 내는 건 온전히 사람 몫이다. 인간 말이다.
소설은 4부로 구성되어 있고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이뤄졌다. 시대는 1918년부터 1964년까지. 세상을 조금 살아온 이들이라면 이 시기가 어떤 시기인지 금방 눈치챌 것이다. 다 아는 것 같은데 다 잊은 듯한 시대 배경.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6·25와 근대화의 과실을 경험하기까지 사람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생채기를 서로에게 남겼는지. 역사는 결코 이를 반복해서 말하지 않는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를 되돌리는 건 결국 사람일 텐데 그걸 해낸 이가 작가 김주혜이다.
조선왕조 6백 년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졌는지 관심 밖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확실한 건 그동안 많은 외세의 침탈이 있었으며, 이를 막아내려 무수한 희생이 뒤따랐고, 그들 대부분이 평범한 이들이라는 것. 제국주의 침략이건 이념을 건 사투 건 그 와중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야 역사가 기억해서 보상이라도 해주건만. 어쩜 이 소설은 선별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그놈의 역사 속 순간순간 겨우 숨죽여가며 살아왔을 이들에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내로라하는 기업을 일군 기업가도 아니고 이념이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떠들어대는 정치가도 아니다. 옥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변하는 세상 속에 어떻게 사람들이 버텨냈는지를 기록해 가는데, 그는 기생이다. 기생을 중심에 놓다 보니 주로 남자와 여자 간에 오가는 그렇고 그런 얘기가 주류가 될 수밖에 없어서 시큰둥 읽다가 다 읽어가는데, 정확히는 에필로그로 넘어가면서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슬픈 거였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길래 엄청 강건한 얘기들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작은 땅이라야 한반도에 대한 비유일 테고, 야수들이라니 날 것으로 살아온 우리 평범한 이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길지 않은 50여 년의 시간 속이 이렇게 많은 일들이 벌어지다니. 시작은 남경수라는 사냥꾼이 야마다 겐조라는 군인에 의해 구조된다. 인연은 경호 아들 정호한테 이어지고 훗날 그가 남긴 라이터가 정호를 구해주지만 나중에 빨갱이로 몰린 그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기생 학교(?) 주인인 은실은 옥희를 만나는데, 옥희는 집안이 가난해 몸종처럼 팔려와야 할 신세지만 스스로 기생의 길을 가면서 월향과 연화와 만난다. 은실은 신분과는 다르게 몸 팔아 챙긴 돈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당찬 여성이다. 월향이 일본군 장교한테 농락당해 애를 가지자 엄마 은실이 자기 딸 월향과 연화, 여기에 옥희를 자기 사촌 예단에게 부탁해서 그들의 경성 생활이 시작된다. 고아 정호 또한 경성으로 오는데 그곳에서 옥희를 만나 첫눈에 반하지만 그 둘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옥희는 배우가 되어 출세의 가도에서 만난 인력꾼 김한철에게 반하고, 한철 또한 19세 옥희에게 반하지만 한철은 몸 팔던 기생 옥희와 연을 맺지 않는다. 연화 또한 잘 나가는 가수가 되어 돈 많은 마 사장과 엮이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버림받고 잠시 행방불명이 된다. 나중에 옥희가 연화를 사창가에서 구해내서 미국으로 보낸다. 이건 월향이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만난 부영사와 결혼에 미국에 갔기 때문. 단 한 명을 가족으로 초청할 수 있기에. 그럼 월향이 제일 잘 풀린 것일까?
김성수는 독립만세 인쇄물을 만들어서 배포한 혐의로 나중에 구속에 처해도 자발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 드러나 옥살이를 면하지만. 그것도 그의 자의가 아니었다. 친구 이명보를 도와준다고 한 것인데 이명복이야말로 독립운동의 뒷배이면서 거물급 인사. 정호는 그 밑에서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지만 그때 그 시절 대게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그렇듯이 역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결정적으로 고아 대장 정호를 팔아넘긴 건 미꾸라지라는 그의 오른팔. 블라디보스토그, 만주,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과 자금을 건네던 명보 또한 사라지는데 그와 얽힌 인연이 은실과 예단이었다. 비록 몸을 팔지만 기개만큼은 김성수에 뒤지지 않은 여성들.
우리에게 이름이 익숙한 김성수는 실재처럼 소설에서도 성공하지만 철저한 친일분자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하지도 않은 채 그 부를 한철에게 넘겨준다. 한철이 자기 딸과 결혼했는데 한철은 그 유명한 김 씨 가문으로 종손이 죽자 방계지만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아 당시 최고의 부자가 된다. 옥희가 사랑한 한철은 옥희가 정호의 석방을 위해 찾아가고. 그럼 결과는? 헛수고. 정호는 소설 속에서 잊힌 인물이 되고. 일본 군인 출신 이또 아쓰오의 동생과 결혼한 야마다 겐조는 친구 이또 아쓰오와는 다른 진짜 군인으로 그때를 살아간다. 그도 결국엔 태평양 전쟁의 전범일 뿐.
대게 익숙한 이야기들. 친일분자들과 독립운동 투사들과 그사이 오가는 평범한 이들과 그 와중에서 누군가 출세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건 엄연히 역사에도 나오는 진짜 사실들이고, 이걸 약간 비틀고 각색해서 만든 등장인물들이 되는데. 그중에 진짜 주인공 옥희는 끝까지 주인공이 된다. 이것이 중요한 것 같다. 누군가 기록으로 이야기를 남기는 건, 옥희의 목소리로 기억을 남기는 건 작가 김주혜의 몫이지만.
중요한 건 시대가 어떻든 살아남는 것. 정호가 독립운동을 하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라지자 옥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울을 떠나는 것이 최선. 그런 옥희가 인생이란 거친 항해를 거쳐 제주도에 정착해서 물질을 배우기 시작한다. 호랑이로 시작해서 해녀가 되는 이야기 끝은 결코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가정폭력으로 자기 아들을 낳고 도망간 해녀의 아들 철수를 만나 그를 키우면서, 그가 드디어 전복 하나를 딴다. 그렇게 그는 제주도에 녹아든다. 그 전복 속에 든 진주하나.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p.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