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뭐가 달라질까?

백수린(2025). 봄밤의 모든 것. 문학과지성사

by 길문

봄이 오면 뭐가 달라질까? 봄이 와도 별거 없다는 걸, 봄날이 가면 남는 잔상은 이제 쓸쓸함보다 더위가 시작된다는. 이제 봄이 언제였는지, 그 끝은 바로 무더위라고 먼저 느끼는 걸 보니 이제 세월이란 더깨에 허덕이고 있나 싶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느덧 유효기간이 지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더 정확히는 그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런 생각은 그저 생각에서 멈춰야 하는 하는 이때 손에 들어온 책이었다. 제목이 《봄밤의 모든 것》. 제목에서 힌트를 찾으려니 잘 찾아지지 않았다.


읽다 보니 〈아주 환한 날들〉은 처음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읽었더라? 나이 일흔에 '환한' 날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만은. 이건 남과 다른 일흔에 '환한' 걸 찾아야 할 것 같다. 주인공 그도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그런 그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았다면 소임은 다 한 것임에도 그 과정에 듬성듬성 남는 빈자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러니 채워진 앵무새. 사위가 당분간 맡아달라는 건 감사한 수고. 빈자리란 결국 외로움이 머물던 자리일 텐데 손이 많이 가던 앵무새가 떠나니 남은 건? 어떻게든 남는 시간도 정주면 생각보다 멋지게 가거늘,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갈 유효기간을 늘리는 방법. 몰입하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 여기선 앵무새.


난 생계를 위해, 사촌 언니는 교환교수로 미국에서 만났다. 그 후 2월 말에 인주 언니는 귀국하고 정규직 간호사가 된 나는 뉴욕에 남았지만 자주 어울리던 룩스에는 가지 않았다, 더는. 장소 룩스가 lux라는 뜻 같아서 작가는 빛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빠졌던 것일까? 뉴욕에 온 사촌 언니는 큰 이모를 돌보느라 빛이었던 시기를 잃어버렸는데 늦게 남아 잠시 찾은. 잠시 일렁였지만, 잠시 머물렀지만 빛났던 순간. 개리를 바라보는 언니 눈빛을, 이걸 욕정이라 부르면 치욕이 될 터. 언니가 바라보며 스스로 빛을 냈던 대상 개리는 언젠가 우리 반에 왔던 교생실습생을 바라보며 내가 내던 그 빛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다들 〈빛이 다가올 때〉가 있었는데, 그걸 느꼈다는 건 이미 지나간 것이다.


이번엔 배경이 미국이 아닌 프랑스. 석사 유학생이라도 유학생이니 언어가 서투른 건 당연. 이때 그 옆에서 같이 서툴게 낯섦을 이겨내던 나루카와 유타가 있었다. 그는 귀국한 후 연로한 할머니를 돌보며 그나마 남은 젊음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랬다는 것인데, 정작 그의 나이는 그를 만났을 때 서른여덟이었다. 때가 되어 귀국해 직장인으로 살면서 남자도 만나 정착한 나는 우연히 버려진 개를 입양하며 살다 보니 시간이 순간 지나갔다. 간간이 프랑스에 출장을 가도 남은 건 추억이라 유타를 기억해도 그곳엔 그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가 죽음으로써 유타가 생각나 연락을 해보니 그동안 그도 그의 유일한 할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냈었다. 그렇게 공유한 〈봄밤의 우리〉였다.


작가는 개를 좋아했음에 틀림없다. 이번엔 〈흰 눈과 개〉. 다리가 하나 없는 검은 개는 앉아있을 때 드러나지 않으니, 이건 딸과 아빠와의 관계를 상징한다. "딸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걷고 있었다." 딸이 사위를 만나 애를 낳고 스위스에서 살아간다면 누구에겐 선망이 될 테지만. 사위는 마다가스카르 출신 입양아라서 손녀딸은 혼혈이 되는 거고, 사위는 그곳에서 주류로 살아가는지 의문스럽던 차에 딸이 8년 만에 만나자는 것은 화해를 위한 신호라도 이게 쉽지가 않다. 그들 공백이 쉽게 메워질까? 기껏 공감대란 기대에 어긋난 딸을 바라보는 아빠와 잘 살고 있음을 보이고픈 딸의 마음이 같다는 정도. 그런데 개가 있었다. 다리 하나가 없는 개가 그들 앞에서 뛰어올랐다. 순간 어색함이 일순 사라졌다.


다음 단편들인 〈호우豪雨〉,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각각 다른 시점에서 쓴 소설인데 이를 소설집으로 만들면서 연작으로 묶었다고 한다. 하기야, 소설가라도 없는 얘기를 지어낼 수 없으니. 창작이란 것도 새로운 뭔가를 도장 찍듯이 찍어낼 수 없으니 이해가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 이름이 겹쳐 혼란을 주었는데, 그렇다고 소설이 준 감동이 달라지진 않았다. 〈호우豪雨〉에서 소희는 중산층 전업주부이다. 성실한 남편 덕에 청약으로 아파트를 당첨받아 안락한 중산층 삶을 살아오고 있다. 낡은 주택가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꿈은 작가였기에 아직도 남은 감성을 품고 세상을 살아왔는지 자꾸 그의 눈에 밟히는 파란 대문 집과 노인. 노인이 집을 아주 예쁘고 정성스럽게 가꿔왔었다. 어느 날 도서관을 오가며 바라보는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텅 빈 것이다. 뭔가 불안한, 집안에 놓였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는 건 그 집 노인도 사라진 걸 의미하니까.


〈눈이 내리네〉는 소희 친구 다혜 이야기. 다혜 또한 지난날들을 돌아보는데 그 또한 소희 또래다. 희망과 기대와 꿈으로 부픈 나이가 아닌 어느덧 중년을 넘어서며 돌아볼 것들이 제법 눈에 들어오는 다혜. 유독 걸리는 건 그의 청춘에 걸쳐있던 이모할머니였다. 하숙을 치며 지내던 그 집에 방이 남았는데, 엄마가 그 집을 다혜 하숙집으로 결정을 한 것이다. 이러니 원하지 않던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팔팔 끓는 청춘과 산전수전 다 지난 칠십 대 할머니와의 벌어진 작은 소음. 그걸 대신한 건 지금까지는 그저 시끄러운 TV 소리였다. 나이가 듦에 따라 떨어지는 청력은 핑계(?)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이모할머니를 빈집에서 그때까지 버티게 한 것은 아닌지. 다혜가 이걸 느낀다는 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살아온 지난날들은 정말 '무엇이었는지, 로 읽혔다. 이번엔 소희도 다혜도 아닌 주미가 겪은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그걸 언급하는 내 이름은 상아. 제목만큼이나 읽으면서 뭘 말하는지 아리송한 건 맞지만, 그것이 뭔지 명확히 말을 하지 않아 생뚱맞은 것 같다가도, 소설 속 주인공들이 20대도 아니고 벌써 중년에 접어든 나이를 감안하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도 같은. 이들 동창 네 명이 리조트로 여행을 떠난다. 그 와중에 나온 이야기. 주미가 12년 전 독일에서 겪은 사건이 중심이다. 주미네 부부가 아는 지인의 초대로 머물 개 된 빈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 누가 어떻게 왜 내는가에 대한 답은 없으니, 그건 그들이 살아오면서 낸 소리였을 거라고 유추하는 수밖에 없는.


그가 쓴 소설을 읽다 보면 남는 건 아련함이다. 이걸 빛이라고 치환되려나? 이걸 이 책 평론가는 '잘 적응된 허무'라고 표혔했는데, 같은 느낌 다른 표현이라면. 백수린 글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쁘띠(Petit)라는 단어였다. 작은 혹은 사소한, 아니면 어린이란 뜻으로 활용되는 프랑스어 형용사.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로만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이걸 넣어 표현할 때 가장 어울릴 단어는 쁘띠 부르주아가 될 텐데, 그의 소설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백수린은 이런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살아온 날들이 그랬으니. 그랬기에 그가 쓴 소설들에는 자주 외국 생활이 등장하는데, 그거야 그렇다고 해도, 소설 속 인물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 않음은 나만 느끼는 걸 테지만. 그랬기에 쉽게 손에 꼽지 않는 작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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