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재미가 있어야죠?

폴 오스터(2025). 바움가트너. 열린책들

by 길문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이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세상을 떴을까? 세상이 넓으니 작가도 많고 그 많은 작가들이 쓴 책들을 다 읽어볼 수 없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세상엔 많은 작가들이 있구나를 느낀 것보다 세상이 넓으니 세상엔 많은 작가들이 있는데 그 많은 작가들보다 그걸 읽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기준으로 책을 읽는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해를 넣다 보니 이상했다. 폴 오스터(Paul Auster)란 작가는 2024년 죽었는데, 그가 살아서 낸 소설 같아서였다, 매번 그런 걸 이번에 느꼈다?? 죽은 자가 글을 쓸 수 없으니 아무튼 살아서 쓴 그의 마지막 소설이 바움가트너(Baumgartner)인 건 확실하다. 유작이라고? 그러니 그를 아는 이들은 이 책을 아쉽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들 마지막이라고 하면 아쉽지 않겠는가? 그건 인지상정이지만, 폴 오스터가 누군지 모른 지 모르는 백면서생 입장에서야 고통을 느끼려고 책을 읽을까마는,


소설이 재미없었다. 소설 내용이 재미없으니 읽는 것이 재미없었다. 날씨도 더운데 말이다. 난감하다. 폴 오스터가 누굴까? 인터넷을 뒤져보니 꽤 유명한 미국 작가였나 보다. 지금은 없는 사람이면서, 전혀 몰랐던 사람이다. 유튜브에 책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어 듣다가 반감이 몽실몽실 생기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별 특별할 것 없는 책을 굉장히 뛰어난 책으로 설명하는 그 누군가 빰을 한대 갈기고 싶어졌다. 흠, 날씨가 더운 게 틀림없다.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나??


모든 것이 더위 탓이라기보다 무지 탓이 더 큰 거지만, 반감의 요지는 간단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생각해도 책 내용이 정말 그럴까? 황혼에 접어든 어떤 남자가 보인 "생의 끝에 서서 들여다본 상실과 빈자리, 그곳에서 발견한 눈부신 기억의 파편들"이란 상찬이 와닿지 않아서였다. 그가 살았을 떼 이런 말을 들었다면 오글거린다고 그가 말할 것 같다.


구글 번역기에 영어 Baumgartner를 넣으니 한국어로 바움가르트너로 나왔다. 하하! 혹시나 해서 wordreference.com으로 돌려보니 baum은 나무라는 뜻이고 gartner는 정원사라고 나왔다. 독어로는 가르트너. a에 움라우트가 있다. 바움가트너는 사람 이름이다. 그는 70대의 나이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10년 전 아내를 사고로 세상에서 먼저 보내고 혼자 여생을 상실감과 슬픔 속에 살고 있다. 그저 냄비를 태우거나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상이 다반사 인건 그가 늙었기 때문이다. 이건 작가가 실재 그 나이대였으니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완전한 감정 이입?


늙어서 더 외로울 테니 죽은 아내의 빈자리가 아주 크다. 그래서인지 아내와의 만남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회상한다. 시점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 이건 그만큼 아내 애나와는 아주 잘 맞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닌 애나이기에,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인간 그루터기로 자신을 묘사한다. 그렇다고 그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다. 많은 나이지만 새로운 사랑을 꿈꾸기도 하는데, 이건 그가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남은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현재에 집중하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작가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자기 삶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며, 그 안엔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현재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그래야만 함을 알려주지만, 그런 내용만으로 주인공이 그가 살아온 인생을 통찰하고, 그렇게 쓴 이 책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보여줬는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은 건, 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문득, 소설을 왜 읽는지 생각하게 만든 책이라서 의미가 없지 않았던 소설. 세상은 아주 넓어서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다 달라짐은, 소설도 예외가 아니기에, 누군가는 이 책을 존 윌리엄스(2015)의 《스토너》와도 비교를 하던데,


《스토너》를 읽으면서 교수인 작가가 교수라는 틀을 깨지 못한, 그건 여제자와의 불륜을 사랑이라고 묘사한 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얼핏 그리는 시대상과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미련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부정을 하지 않는 건, 정말 세상에 나온 텍스트는 누구든 그걸 자기식으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러고 보니 나란 독자는 재미로 책을 읽는 건 확실했다. 그때 재미라는 건 다중적인 의미라서. 이것도 정말 자기 기준이니 할 수 있는 말.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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