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닿은 선물?

성해나(2022).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by 길문

선물 같았다. 기대하지 않은. 그저 서가에 꽂힌 낯선 이름. 누구지? 많은 작가들을 다 알 길 없으니. 한 해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는 소설가들 숫자만 해도 많으니까. 결론, 내가 이런 소설을 좋아하는구나. 여기서 이런 은 '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제목에 빛이라? 어둠보다 나으니까. 그럼 된 건데, 소설 내용들은 빛이라고 하기엔 어둠 쪽에 가까웠다. 그렇구나! 작가란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지? 어둠을 걷으면 빛이 아니라, 빛을 걷으면 어둠이 아니라, 빛을 걷으면 빛이라고 말하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처음부터 잘 읽혔냐고? 언두, 괸당, 당춘이란 단어는 생소했다. 뭐 이런 제목을 썼나 하다 보니 O.K. Boomer에서 걸렸다. 이런! 편견과 자기애로 똘똘 뭉쳤어도 나름 젊다고 자부했는데 제목 가지고 투덜대다 보니 나도 Boomer였다. 이건 로제 아파트를 들으며 들썩이는 몸으로. 케더헌을 누가 더 커버를 잘 하나를 찾아보며 흡족했던 마음에 일순 냉기가 돌았다. 이런 건 정말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런데 굳이 다른 세대를 이해해야 할까? 그들도 위 세대 Boomer를 이해를 안 하는데 말이다??


OK, Boomer. 난 한때 전교조 교사였으니 진보적이라고 믿었다. 진보란 뭘까? 여기선 젊은이들을 누구보다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것. 그런데 아들이 어울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무너졌다. 소위 말하는 MZ 세대. 우리야 이를 하나로 묶지만 그 안에서도 차이가 많다는데.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이 전혀 다른 음악을 한다니! 연습할 곳이 없어 집에 왔는데, 베지라고 고기를 뺀 피자를 먹거나, 나름 어른한테 인사도 안 하는 쿨 내를 진동하고, 평생 자부심 전교조 상패를 함부로 다루니 폭발한다. Boomer라는 한계가 드러나는데, 그걸 라이브 하는 애들이라니.


언두(undo). 처음에 뭔 말인지 몰랐다. 언두? 뭔두?? 나중에서야 언두가 undo인 줄 알았다. 원상태로 되돌리다니. 그럴 수 있다면. 이건 리셋과도 비슷한데. 뭔가 벌어진 걸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때 반드시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어야 한다. 기억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언두를 하건 리셋을 하건 하는 주체가 망각까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데이팅 앱으로 유수와 도호가 만난다. 그저 하룻밤 만남을 넘어선 그들 관계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데, 브레이크가 어느 순간부터 걸린다. 유수의 아버지는 십 년째 두 집 살림을 하고, 도호는 고아가 될 뻔한 그를 할머니가 거둬 키웠는데, 그 할머니가 농인이다. 과정이 쉽게 나아가지 않기에 유수는 "난 네가 될 수 없어"를 속으로 외치며 언두 하지만 어쨌을까? 기억은 이게 되질 않는다.


김일성이 죽던 해. 결국, 작가가 하고픈 얘기가 담겼다! "이 생에서 건강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쓰고 싶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여자에게 여자인 엄마는 알다가도 모를 말을 하는 사람인가? 남자에게 남자인 아버지가 알다가도 모를 말을 하는 사람인지 남자는 굳이 따지지 않는다. 이건 미뤄 짐작한다. 수많은 오해와 외면의 시간을 가져도 의례 '그렇지' 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수많은 오해와 이해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여자와 여자인 엄마도 그럴 텐데, 여자는 그걸 짚어 내는 것 같다. 글쓰기 수업 중 학생 한 명이 질문한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은 "주인공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소설"이라니. 이건 작가가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실재 바람을 나타내지만, 엄마를 이해하는데 실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엄마가 쓴 '김일성이 죽던 해'를 읽고 나서부터.


당춘. 어느 날 삼촌이 연락을 한다. 용돈을 줄 테니 진천에 내려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에게 유튜브 영상 편집을 가르쳐 달라는 제안. 백수에 가까운 나와 헌진은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방송 놀면 뭐 하나처럼 놀면서 돈을 많이 받는 소위 '공인'들과 다르게 이 땅의 누군가의 실상을 제대로 그려주니 그저 선물처럼 여겨진 건 그 때문이다. 돈 때문에 왔지만 그들 머릿속엔 온통 불안정한 미래만 엄습하니,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육생도 한몫했지만, 거기엔 아직도 공동체에 대한 이상과 열망을 잃지 않은 삼촌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절망만 있을까? 그 나이에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면서 이 땅의 많은 진짜 나와 헌진이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오즈. 실버타운이 대안이 되지 않음은 이미 현실적이라서 다른 방법은? 제너레이션 믹스가 시험적으로 프랑스와 일본에서 진행되기에 그중 하나로 독거노인 하우스 셰어링 사업이 성공했으면. 어린 동생이 자기로 인해 죽었다는, 여기에 엄마까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홀로 남은 내가 선택지로 남은 건 이것뿐이었다. 그렇게 동거인이 된 오즈라는 할머니. 무뚝뚝하고 얼핏 까탈스러워 보이는 그와의 관계를 일순 허문건 타투 때문이었다. 내 몸 안에 주저흔을 감추려 스스로 새긴, 할머니 몸에 있는 타투는 일본군이 남긴 고통을 상징하지만. 낡은 심장박동기에 의지하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라도 몸 안에 새겨진 치욕은 지우고 싶었던 할머니. 비록 그녀가 의지한 낡은 심장박동기처럼 그녀도 수명을 다하지만 그동안 둘 사이 장벽이 허물어졌다.


화양극장.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기를.' 이걸 경에게 알려주려 신이 이목을 보냈는지 모른다. 작가가 문득 다가온 선물 같은 느낌은 다른 세대인 내가 잊었던 걸 소환해 주고 여기에 요즘 애들 세태까지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게 작가가 선물이듯 경에게 할머니 이목도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만난 건 화양극장에서였다. 임용고사를 여덟 번 낙방을 했으니 사는 의욕이 없을 수밖에. 특히 이 땅에선 "남들만큼 살아야 한다"라는 건 절대 명제였으니, 자존감이란 자존감이 바닥난 상태. 이목은 여성으로 드물게 과거 스턴트 배우였으며, 사고로 은퇴할 수밖에 없던, 여기에 동성을 친구로 둔 할머니. 고양이 이름까지 뤼미에르라고 지었으니 그에게 영화는 절대반지였을 텐데, 어느 날 이목이 경에게 해피엔딩이라고 알려준 영화를 다시 본 그 영화는 참혹할 정도로 비극적인 영화였다.


괸당. 제주 방언으로 친인척을 이르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방언으로 기록된 소설을 읽는데 애를 먹었다. 독해가 딸리는 건 이해를 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굳이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건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 재종숙 부부를 만난 제주도 괸당들도 필히 그랬을 것이다. 친인척끼리 뭉치고 뭉쳐야 하는데, 아버지는 제주 4·3 사건을 겪었고, 재종숙 부친은 고려인 강제 이주를 당한 처지라 쉽게 장벽을 허물 것으로 기대를 했었다. 우선, 제주 고씨 성을 가진 아버지와 재종숙은 피부 색깔이 달랐다. 키가 크고 눈매가 깊은 거야 그러려니 했는데, 백인 혈통이 섞인 듯했으니. 같은 집안사람이란 유대는 한순간에 깨졌다. 그건, 재종숙 부부가 제주도에 온 목적 때이다. 죽은 아버지를 고향 제주도에 묻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재외 동포 비자가 필요했던 것. 그러기 위해 방치된 가업 고야주 사업을 잇겠다는 발언에 모든 것이 한순간 끊어진다. 한 가족이라는 괸당이라는 끈적한 그 끈이.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내가 할 일은 오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비싼 대가를 받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그건 오수 할아버지 상수연을 캠코더로 녹화해 달라는 것. 그 자리는 가보로 내려오는 칼에 대한 진위를 밝히는 자리라는 건 모르고 갔었다. 나야 찍고 편집해 주면 될 일. 오수는 애초 나랑 계급이 다른 아이였기에 앞으로 보지 않아도 그만, 나 또한 딱히 그의 덕을 보려는 사심도 없었다. 그곳엔 나와 같은 그들과 혈족이 아닌 도검 감별사가 있었는데, 그가 사고를 쳤다. 그 도검이 식민지 치하를 유지한 사람들에게 전승된 것이라는 걸 밝혔다. 이 말인즉, 그들 가족은 친일파라는 것이다. 그러니 잔치가 어땠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검 감별사가 사라지고, 상수연은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나 또한 역사를 편집한 것처럼 그날 있었던 불미스러운 장면을 편집하고 과외로 돈을 더 받았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편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역사도 인생도 과거도 현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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