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설렘으로 달뜬 청년.
한국인이세요?
아리따운 그녀가 내게 말을...... 걸 리가 없지! 그럼 그렇지. 내게 말을 건건 남자다. 그것도 시커먼. 위로가 좀 된다면 나보다 한참, 그것도 한참 어려 보였는지는 약~간 아리송하지만 말투가 깍듯한 걸 보니 자기보다 좀 많이 된 것 같다고 틀림없이 생각했을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것도 버스 안에서. 생각해 보면 버스가 되었건 지하철이 되었건 서로 말을 거는 일이 자주 벌어지던가? 익명의 사회에서 누가 말 걸면 신흥종교를 위한 포교나 그 유명한 도를 아십니까, 아닐까 하지 않을까?
말을 건건 맞는데, 그것도 버스 안에서. 단지, 그 버스가 서울 버스도 아니고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소위 공항버스에서 내게 말을 건 것이다. 한국인이세요,라고 말을 건건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건데, 내가 태국인으로 보였으면 한국말로 한국인이세요 했겠는가! 만약, 서울에서 그것도 버스 안에서 내게 한국인이세요,라고 말을 걸면 난 듣는 순간 받은 충격으로 바로 버스에서 내렸을 것 같다. 어디가 부족한가 하고 한참 부모 탓을 했을지도. 얼마나 다행이던가. 나보고 한국인이냐고 물었는데 정말 다행히도 다른 나라에서였으니.
설마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처음 보는 그와 내가 둘 다 처음 가는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같이 내렸을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내려야 숙소에 가니까. 서로 다른 숙소지만, 잠시 후 둘이 다시 만나 카탈루냐 광장을 헤맬지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건 인정하자. 여행하다 만난 인연이야 일회용이 많아서 기대를 하지 않지만,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물가물한 그를 기꺼이 소환한 건 그날 그가 보여준 달뜬 모습 때문이었다.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던 그의 말투와 내용이 나로 하여금 젊은 날 넌 어땠었지를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그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처음 유럽 땅을 밟은 적이 언제더라? 아주 오래전 꽤나 의미를 부여하고 유럽에 갔을 텐데, 그 청년처럼 말이다. 설렘과 기대, 정말 고마운 단어 아니던가? 그가 나에게 한 말을 처음 듣었을 때 내가 타고 온 비행기가 한국인으로 만석이어서 같이 왔나 생각하다, 아닐 거란 확신이 바로 들었다. 그건 내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공황을 빠져나온 몇 안 되는 사람들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큰 캐리어를 옮겼었다. 내 배낭은 가벼워서, 36L짜리에 작은 크로스백 하나가 전부였으니, 여행 내내 가벼운 배낭으로 내 행동은 남들에게 민첩하게 보였을 텐데, 그건 몸이 가벼워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벼운 배낭이 내 발목을 잡을 줄 그때는 몰랐었다.
나중에 트레킹을 시작하는 아스투리아스에 있는 마을 오니스(Cangas de Onis)에 도착했을 땐 처음으로 후회하긴 했다. 비가 와서 기온이 밤에 영상 2~3도로 변했을 땐 플리스 재킷이 생각났다. 가져올걸. 돌이켜 생각하면 안달루시아 지방을 돌아다닐 땐 낮에 온도가 영상 36~8도였으니 그땐 가벼운 짐이 최고였었다. 평지엔 비가 왔으니 산엔 그게 눈으로 변해 산새가 주는 모양은 최고였지만, 바뀐 일정보다 우선 바뀐 날씨(사진 참조)가 마음을 위축시켰다. 있는 옷을 다 껴입어도 보온이 되지 않았으니. 저체온증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했던 그 순간도 지금 생각하는 순간 '과거'가 되었다. 아름다운 추억도 시간 앞에선 맥을 못 추니. 결국, 변한 날씨로 인해 트레킹 일정이 바뀌었지만, 그게 나중에 선물로 변했다. 이런 묘미가 더해진 여행이었다.
청년 얘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말문을 튼 그는 같이 버스에서 내리기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으니. 아주 논리 정연하게 말했을 그의 말을 나쁜 머리로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 같다.
최근 회사에 휴가를 내고 처음으로 유럽을 그것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을 했고, 내일 가우디 투어를 아침부터 참석하고 다음 날 리스본으로 가서 이틀을 지내다 다시 바르셀로나로 와서 이틀을 더 머문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에미레이트 항공기를 타고 오다 두바이에서 스톱오버를 해서 하루 그곳에서 자고 지금 도착했다는, 여자 친구가 바르셀로나에 대해 이런저런 해줬다는 얘기까지 들어준 건, 누가 봐도 그보다 젊어 보일 수 없기에 선배임이 확실하니 갖는 그 선배라는 알량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다 그가 나랑 성이 같다는 우연도 작용했겠지만, 그의 얘기를 중간에 막으면 자라나는 젊은 싹(?)을 싹둑 자르는 불초할 것 같음에 더해, 굳이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에 대한 김을 뺄 필요는 없지 않던가 해서 들어줬을 것이다.
결국, 같이 가려던 타파스 바는 구글 평점이 낮아 패스를 하다 보니 몸은 어느덧 카탈루냐 광장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음악공연이 있어 같이 기대와 설렘이 더 부풀어지는 걸 쳐다보다 흩날리는 담배연기가 싫어, 이곳 사람들은 남녀노소, 공공장소 구분 없이 담배를 애용하니, 담배 냄새와 대마초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는 둘 다 자연스레 사람들을 떠나, 찾다 찾은 벤치에 앉았을 땐 손에 스페인 만두 엠빠나다와 클라라 맥주가 들려있었다. 소량의 알코올로도 취기가 올라와 유럽 여행 첫날밤을 기념하는, 청년 기준으로, 한 잔을 소소하게라도 마셔 다행이었고, 나중에 좋은 선배 만났다는 소리 들을까 싶어 그 밤에 야오야오(llaollao)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배가 고파 잠이 깨니 아침이다. 피곤했었나 보다. 배꼽시계는 언제나 정확해서 일어나 밥 먹으며 뭘 할까 생각하던 중 원래 계획했던 몬주익성을 가기로 했다. 그곳에 올라 바르셀로나가 바닷가 옆에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물론, 하늘에서 바르셀로나 해안선과 심지어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까지 봤지만. 원래 계획이니까. 여기서 '원래'란 원래 오늘(8일) 오전 비행기로 이곳에 도착하는 거였는데, 다행히 직항 편을 구할 수 있어서 어제(7일) 저녁 늦게 도착했기에 짠 일정이 흐트러질까 했으나, 원래 계획대로 해야 할 것 같아 원래 하기로 한 계획을 진행할 건데, 원래 오늘부터 묵기로 한 숙소엔 오후에나 체크인이 된다고 했다. 원래 묵기로 한 숙소에 어제 방이 있었으면 그 청년은 만날 연이 아니었는데, 원래 우연이란 그런 것에 더해, 이번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우연히 만난 청년이 보여주었기에, 앞으로 남은 여정도 기대된다고 잠시 생각을 했겠지?
언제부터인지 여행 중 틀어지는 일정들에 대해 관대해졌다. 이런 것이 여행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건 더 캐면 부실한 나를 발견할 것 같아서 합리화된 건데, 만약 누군가와 같이 여행을 하면 이런 경우 거의 말싸움까지 하겠지만, 혼자 여행하면 기껏 나만 눈 감으면 되는 거라서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러니 어제 산 10회 교통권을 개시해서 지하철을 타고 150번 버스를 환승한 것까지는 좋았다. 이제 탔으니 내리면 되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점차 머리가 멍해졌다. 버스에서 다음 장소를 안내하는데 읽거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내리더라? 이런, 여긴 스페인이었다. 암튼, 그래서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했다는. 그러니 당황했지만 다행히 순환버스였다는. 그렇다고 원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중간에서 내리긴 내렸는데, 얼떨결에 내린 그곳이 마침 올림픽이 열렸던 몬주익 올림픽 스타디움이었다는. 놀랍게도 그 앞에 한글로 황영조 선수를 기리는 조형물이 있었다는. 구글맵을 켜놨으면 하지 않았을, 이런 실수는 그 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알차게 10회권을 잘 썼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버스에서 내린 곳도 여전히 언덕에서 내려오던 길이어서 걸어 내려오는데 힘이 덜 들었으니 남은 바람은 오직 날씨였다. 날씨가 끄물끄물해서,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날씨가 대체로 좋지 않았던 그 서막? 비만 오지 말라는 심정으로 걷다 보니 글쎄 나온 곳이 카탈루냐 미술관이었다. 미술관 건물 뒤쪽으로 걸어 내려온 것이었다. 세상에! 보통 바르셀로나 시내 여행은 주로 고딕 지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향이라서 에스파냐 광장 쪽은 소홀한 것 같은데, 정말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이 되었다. 몬주익성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올라가다 저기 건물이 뭐지? 카탈루냐 미술관일까? 난 들르지 못하겠네 했던 곳에 들렸으니. 이러니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거야라고 말했으면 듣는 누군가 필히 내 머리를 한대 박았겠다!
미술관이란 건물을 멀리서 봤을 때 주변과 꽤 잘 어울린다고 느꼈는데, 가까이 보니 더 웅장했고 근사했다. 근처에 호안 미로 미술관까지 있어 미술에 관심이 있었으면 들르련만, 원래 계획에 없었으니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은 하지 말아야 해서 그냥 눈으로만 보고 내려오다 보니 앞에 분수대까지 있었다. 아, 이거구나. 그 유명하다는 몬주익 분수대가 여기 있었다는 자각까지 덤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한 미술관 덕분에 시야를 가리지 않는 전경에 감탄하다, 그 앞에 물은 올라오지 않았지만 시원하게 물을 방출할 분수대 사이로 조금 멀리 두 개의 베네치아 타워(Torres Venecians)가 보여, 올만한 곳에 왔단 합리화에 마음이 흡족했다.
베네치아 타워는 이름처럼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 우뚝 선 종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진짜 그럴듯하다. 결론인즉, 이곳 에스파냐 광장 전체 풍경은 한마디로 시원시원했다. 뻥 뚫린 공간감이라니. 단지, 옥에 티는 아까 몬주익성 간다고 탄 버스정류장도 보였다는.
참고로, 이때 본 전경이 잠시 후 바르셀로나 아레나(쇼핑몰)에 올라가 공짜로 위에서 내려다본 전망보다 훨씬 좋았다. 그렇다고 투우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이 건물 무시하지 마시라. 외관이 예쁜 거야 그렇다 치고 안에 인테리어가 놀랍도록 현대적일 뿐만 아니라, 지하 주차장 가는 길에 무려 공짜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