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바이러스?

박완서(2025).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by 길문

갑자기 박완서를 떠올린 건 전쟁 때문이다. 지구상엔 호모 사피엔스만 살고 있는 건 아니라서, 당연히 무수히 많은 바이러스도 더불어 존재하는데, 특히 몇몇 바이러스는 생존을 위해 광기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상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것 같아 누가 이런 바이러스를 박멸했으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이런 바이러스를 우리는 인간이라고도 부르니 이걸 어찌해야 할까?


다행인 건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벌어지지 않아서라고 하면 지독히도 이기적인 것 같은데, 이런 무거운 주제를 끄집어내야만 했던 건 그런 사태들을 견디는 힘없는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는 그들에 대해선 미디어가 이를 속속들이 들어내지 않는데 그걸 미디어가 갖는 속성이라고 해도, 이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이 땅에 다시는 바이러스라 불릴 그런 인간들이 사라지는데 힘을 보탤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눈을 감는다고, 관심을 끊어버린다고 없는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없던 일도 될 수 없기에, 그렇다고 전쟁 그 자체를 다루기엔 사고의 깊이와 폭이 너무 얕아 떠벌리기엔 한계가 명확했다.


박완서의 소설은 묵직한 언사를 담아내지 않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소설 말이다. 소설 말미에 작가가 스스로 하는 다짐은 상당히 의미가 깊다. 배경은 작가가 한국 전쟁통에 살아남아 그저 목숨을 부지하다 다시 중공군으로 인해 후퇴를 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가족과 함께 도착한 서울에서였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확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이미 소설가가 되어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에게 한 다짐을 적어 놓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언젠가 스스로에게 했던 진짜 그와 같은 다짐 때문에 나중에 작가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걸 소설을 쓰면서 다시 다짐을 한 것 같은데 이걸 물어볼 수도 없고. 작가 박완서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전쟁을 그가 어떻게 겪었는지 그걸 통해 알고 싶은 건, 난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다는 실존을 넘어, 이념을 깔고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모두 자전적 소설이다. 읽다 보면 이게 정말 소설일까 자꾸 의구심을 품게 되는 건 내용이 정말 감칠맛 나기 때문이다. 이런 문장력이라니. 읽다 보면 자전적 얘기는 알겠는데, 어디까지 소설인지 약간 혼란스럽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감정에 대해 한 올 한 올 풀어낼 수 있다니. 소설 어디에도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장면이 없음에도 전쟁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기막히게 묘사하는데, 이건 기본적으로 박완서만이 해낼 수 있는 미덕 같다. 시대를 감내해야 했던 그가 바라본 세상은 어땠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2025)가 후편이라면 전편인 이 책은 개인적으로 후편보다 훨씬 생동적이다. 1930년대 초반 개성 인근 박적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어느 날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의 가난한 달동네 현저동으로 주인공이 이사를 한다. 엄마의 높은 교육열은 그를 위장전입을 시켜서까지 도성 안에서 그녀를 신여성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엄마가 살아온 삶과 다른. 서울에서 맞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지 못한 채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을 맞이한 가족은 피난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는다. 나중에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오빠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1.4 후퇴 때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주를 한다.


조연으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가족들이 등장하는데,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모습들 중에서 특히 엄마와 오빠에 대한 묘사가 가슴에 남는 건 이유가 있다.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위선적인 엄마의 모습을 정말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과 더불어 허약한 지식인 오빠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리하기 때문이다. 영민한 오빠는 좌파 지하운동을 벌이다 북에 인민군으로 끌려가기도 했고, 살아 돌아와 다시 남하하는 과정에서 국민방위군에도 가입을 한다. 바로 이거다. 엄마가 악착같은 생활력을 발휘해 쉽게 표변하고 오빠 역시 생존을 위해 방위군으로도 변신하는 모습이 어린 그의 눈에 비치기 때문이다.


한강을 건너야 한다는 건 상징적이다. 이념을 넘어 밀릴 때 밀려가지 않는 건 반동으로 여겨진다. 북으로 밀려갈 때 남쪽에 남는다는 건 그쪽을 따르지 않는 거고, 반대로 남으로 밀려갈 때 서울에 남는다는 건 역시나 흐름을 따르지 않는 거라 위험하니까. 이건 어느 사회에서나 작동되는 원리 같다. 살아남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이 처하는 선택 말이다. 소설을 읽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의사 결정권자가 아닌, 전쟁이란 광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이건 뉴스가 말해주지 않으니까.


전쟁이 보여주는 광기가 어느덧 게임이 돼버린 오늘을 살아가면서,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참상 어디에도 숨죽이며 공습을 견뎌내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은 많지 않다. 이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렇다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기록될 날들을 기다려야만 알 수 있는 건지. 마치, 작가가 묵시적으로 시대를 기록하겠다는 언약처럼, 우린 지금 벌어지는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걸 누군가 기록할 시간이 필요한 걸까?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책 제목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빌어 말하면, 내용은 다 까먹은, 지금 전쟁을 벌인 플레이어들은 틀림없이 인간의 얼굴을 한 바이러스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