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보내온 사진 한 장이 눈에 확 띄었다. 이것 때문이었다. 태안에 갑작스레 여행을 간 것은.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인데, 그 결과가 좋았다. 여행의 재미가 쏠쏠했다. 모래사장인지 언덕인지, 해안사구라고 불리는 곳. 사진이 알려준 그곳은 신두리였다.
언어가 문제가 될까, 시간은 문제가 좀 될 수도. 우리 땅인데,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떠나는 둘만의 여행. 좀, 거창하다. 그날 하루 바람 쐬러 간 건데. 즉흥적으로 결정한 건데, 이번은 흔치 않게 예외가 되었다. 좋았다는 말이다.
모래언덕이 태초의 신비를 간직하면 얼마나 간직할까 하고 간 곳. 태초인지 어떤지 그건 기록에나 드러날 뿐, 기록으로 보니 정말 오래된 곳인데,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이곳에 가기 전에 여기가 어딘가 하고 찾아봤더니, 태안이다. 어딘가 이름이 낯익다. 처음이 아닌데, 기름을 걷어내겠다고 봉사활동을 한 곳. 그게 언제더라? 태안에서 벌어진 기름 유출 사고. 그래서 익숙한 지명 태안. 그곳 태안군에 신두리가 있었다. 국내 최대라는 모래언덕 말이다.
기름으로 범벅이 된 곳, 그런데 상전벽해란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감동했다고? 원래의 원래 모습이 기억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이곳이 좋았다. 이때 전체적이란 신두리 해안사구, 천리포 수목원, 만리포 해수욕장, 그리고 귀갓길에 들른 천수만까지 말한다. 아쉬운 건 그 멋지다는 낙조를 제대로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만 빼면, 날씨까지 모처럼 여행을 반기는 것 같았다. 날씨가 어찌 사람을 반길 까만 은, 남들도 다들 이렇게 표현하니, 비가 와서 좀 구질구질한 것보다 훨씬 좋다. 그래서 여행은 날씨가 50% 이상 차지하는 것 같다. 감정이 말이다.
날씨가 좋으면 그냥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이게 여행의 시발이자 끝이 아닐는지. 서설이 길군... 그래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태안에 감동했다고? 그건 아니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쪽 경치가 뻥 뚫린 듯한 보령보다는 훨씬 볼게 많았다. 바닷가로써 말이다. 그래서 먼저 둘러본 곳은 만리포 해수욕장이었다. 여행 목적과 동선으로 보면 신두리가 먼저야 하거늘, 배꼽시계가 울려서 먼저 들렀다. 사람들한테 알려진 곳이니 음식점들이 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단세포적인 생각.
▶ 만리포 사랑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만리포 사랑'의 앞 소절이다. 차에서 내릴 때 아버지께서 만리포 사랑이란 노래가 있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정말 있었다. 반야월이 작사했다는, 반야월도 잘 모르겠는데 '만리포 사랑'이라는 노래라니. 유튜브로 찾아보니 주현미가 2019년에 부른 영상도 있다. 1958년도에 나온 노래라는데, 아득하다. 그래서 아득한 것은 알겠는데, 정취가 뭔가 다르다. 당연히 다르겠지만, 박자나 음절, 그리고 리듬이 낭만적이다. 노래를 듣다 보니 정말 기적이 울리는 것 같다. 배에서 말이다. 이곳 만리포가 그냥 여느 바닷가 한 곳이 아니었나 보다.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했으니, 그래서 이곳에 오기 쉽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더 소중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낭만이 있었음직한 만리포. 지금은 차로 흉하고 왔다 다~봤군 하고 휑하니 가버리는 시대이니.
이곳에 올 때 철 지난 바닷가라서 썰렁할까 했더니, 아니다. 제법 사람이 많다. 아직 계절이 여름과 가을 사이여서 그런 것인가? 지난여름 휴가를 가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그런지 해수욕장 분위기가 밝다. 이런 이유는 가족단위로 노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인 것 같기도 하다. 바로, 눈앞에 선 엄마까지 포함해서 다섯 명의 여성들이 모래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바닷가 모래사장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비록, 항구는 아니지만 갈매기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그것도 나란히 도열해서 서 있는데, 이렇게 많은 갈매기가 서로 줄을 맞춘 듯 서 있는 모습이 낯설어서 익숙하지 않다. 갈매기가 이렇게 많았던가. 한적한 모래사장 쪽에는 갈매기가 떼로 몰려 쉬고 있다. 당연히 바닷가 감초가 갈매기일 텐데, 생각보다 많았다. 아주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숫자로는 밀리지 않겠다는 심사인가?
거기에 원반 던지기. 아주 열심이다. 한 번도 아니고.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이 던지면 헥헥거리고 떨어진 원반을 주워서 발을 몸에 담근 후 좀 쉬었다 주인한테 가져다준다. 나라면 안 할 텐데... 저게 주인이라고 똥개 훈련시키나 하고 반발이 심했을 듯... 맛있는 것을 얼마나 주려나. 다행이다. 개가 아니라서... 더 인상적인 것은 주인의 체격이다. 헐크 같다. 헬스클럽에서 만든 몸인 듯. 그러니 상체를 드러내고 개 하고 놀겠지? 얼굴? 멀리 떨어졌지만 그래도 잘생겼던 것 같다. 여성이라면 눈여겨봤을 테지만. 남자라서.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강아지를 데리고 온 가족이 많이 눈에 띈다. 그래서 만리포가 어쨌냐니까? 따봉이다. 바닷가는 동해나 남해라는 편견이 가시는 날이었다. 그만큼 만리포 바닷가가 좋았다. 더불어 공짜라서 그랬을 텐데, 전망대에 올라 저 멀리 시선이 닿는 곳까지 시원스레 다 내려다보았다.
▶천리포 수목원
만리포 위쪽이 천리포, 그다음이 백리포, 그다음이 십리포, 그다음이 일리포. 뭐 큰 의미는 없지만, 재미있다. 누가 명명했는지. 만리포가 준 포만감이 천리포에서도 이어졌는데, 그건 바닷가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천리포는 바다가 아니라 당연히 수목원이 명물이다. 이름이 천리포니, 만리포에 비할 리 있겠는가. 그런데, 그 아쉬움의 공백을 수목원이 메꿔준다. 이곳에 수목원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는데 민간인이 세운 수목원이라니. 민병갈 선생이라. 정말 생소하고 낯설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민병갈 선생이 만든 곳이라는데, 이렇게 이름을 남겨도, 남기기가 쉽지 않지만, 이렇게 살다 갈 수만 있다면. 남한테 미치는 선한 영향이라니. 이러면 죽어도 죽은 게 아니리라.
자료를 뒤져보니 이곳에 총 1만 6,800여 종의 식물이 있다는데, 그냥 산책만 했다. 결론이다. 그래도 좋다. 처음에는 그래도 수종을 확인하다, 그냥 즐기기로 했다. 생각보다 넓어 다 둘러보지 못했다. 곳곳에 의자 등 쉴 곳과 카페도 있어 좋은데, 걷다 보니 바닷가 위쪽으로 살짝 천리포 해수욕장이 보인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 더불어 식물에 관심이 많다면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 정말 강추다. 어린이들과 함께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나올 때 가족 4명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광경이 정감 어리다. 그러고 보니, 가족은 꼭 4명이지? 아빠, 엄마, 딸, 아들. 전형적인 듯한데, 이상적인 것 같다. 생존과 더불어 종족보존에 노후 대비까지. 아닌감? 이리저리 둘러보고 난 후 수목원을 나오다, 예쁜 꽃모종 하나 사 왔다. 오래오래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그냥 저절로 든다. 입장할 때 좀 비싼 듯한 입장료가 나올 땐 전혀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 그 가치를 입장료로 생각하다니... 이런...
▶천수만
천수만 방문은 계획에 없었다. 정말, 즉흥적이다. 가다 들렀는데 그 이유는 태안반도를 타고 내려갈 수 없어서였다. 태안반도를 타고 내려갔다, 다시 올라 아버지 집에 가려는데 시간이 이미 훌쩍 지난 거야 그렇다 해도 아버지가 피곤해 보이셨다. 힘드셨을 것이다. 운전하는 나야 사고 때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고. 꽃지 해수욕장 쪽으로 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각. 뭍으로 돌아가기에는, 아니 올 때 그곳으로 왔기에 좀 더 해안가를 달리고 싶었다. 그러다 가보니 그곳이 천수만이었다. 말이 천수만이지. 천수만 전체는 보통 넓은 게 아니다. 나중에 지도에서 확인해 봐도 만 전체가 천수만이다. 그래서 이곳이야말로 만수만이라고 할 터인데, 그게 아니다. 이때 천수는 숫자 그 천이 아니다. 이때 천수(淺水)는 수심이 얕다는 의미라고 한다. 아, 그래서 우리나라 최대 철새 도래지가 된 것이구나,라고 끄덕여진다. 그 넓은 곳이 다 만이라니.
집에 가다 방파제에 잠시 멈춰 간월도 사진이나 찍을 걸 하는 후회는, 이미 바람에 날려갔다. 후회는 소용없는 법. 정말 쓸모없다. 그냥, 기약이다. 다시 와야지 하는 바람. 이곳이 왜 낙조 명품 장소인지 그건 확실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해안이 주는 풍경이 새삼스럽긴 한데, 이건 그만큼, 내가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볼 곳이 많지만, 시간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고. 의외로 우리 땅 작은 듯 넓다. 막연히 주차할 곳을 찾다 불쑥 골목길을 도니 나온 탁 트인 만리포. 그 만리포를 향해 신두리로 향하다 들른 수목원. 바다를 끼고 여유롭게 달리다 도착한 신두리 해안까지. 이래서 여행이 좋은 거구나라고 생각한 소중한 시간.
▶신두리 해안사구
신두리 해안사구 옆이 너무나 당연하게 바닷가이다.
원래 주인공이 나중에 나오던가? 이곳에 오려고 태안에 간 건데. 서해안. 해안선이 길어서, 바람이 많이 불고 모래가 많아서 쌓이고 싸여 이런 모양이라니. 동해안에는 생길 수 없는 지형. 사람 보고 쌓으라고 했으면 했을까? 신이 쌓았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했었을.... 이곳 신두리 해안사구 길이는 약 3.4km이고, 폭이 약 0.5~1.3km의 모래언덕이다. 육지와 바닷가 사이. 뭐, 이곳도 당연히 육지지만, 이런 곳 옆에 바로 도시가 만들어지기는 어려웠을 터. 바람에 날리는 모래 때문에 살기도 어려웠을 터. 한반도에서 빙하기 때부터라는데 빙하기? 1만 5천 년부터 서서히 형성되었고, 북서 계절풍을 직접 받는 지역에, 강한 바람에 의해 모래가 해안가로 운반되면서 오랜 기간 모래언덕이 만들어진 곳. 그래서 동해나 남해에는 이런 지형이 어려웠을 것이다. 북서 계절풍이란다. 북동풍이 아니라.
이곳 사구는 구체적으로 전 사구, 사구 초지, 사구습지, 사구 임지 등으로 구분하는데, 현장에서 이를 구분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다 모래언덕으로만 보인다. 이때, 지질학자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신두리 해안사구와 같이 맞붙어 있는 해수욕장은 약간 뻘도 섞여있는 것 같다. 그래서 유명한 곳이 아닌가? 해수욕하기는 잘 모르겠지만, 물이 얕아 보여 가족단위로 놀러 오면 좋겠다. 그런데, 이곳은 그냥 해안사구만으로도 풍족하다. 다시 지도를 보니 이곳이 서해안 육지 끝이다. 반도로 치면 남한에서 서해 쪽으로 가장 멀리 갈 수 있다. 육지에서 더 멀리 서쪽으로 갈 수가 없지만, 그래서 이곳도 땅끝이라고 불려도 되는 것 아닐까 잠시 생각했지만, 별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땅끝은 그냥 남해에 있는 것으로 족한 것 같다. 오늘은 중간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왔지만, 담에는 꼭 전체 한 바퀴 돌아야겠다. 이 낯섦을 반갑게 맞아야겠다. 겨울에는 말고. 너무 쓸쓸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