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 김애란(2019). 달려라, 아비. 창비
달려라, 하니도 아니고. KBS에서 아주 오래전에 방영했던 만화 제목과 유사하다. 달려라, 아비라. 처음에 아비가 뭔 말인지 몰랐다. 아비? 어미의 반대말?
만화에서는 여주인공이 엄마를 여의고 혼자 아파트 옥탑방에 사는 얘기다. 육상부 홍두깨 선생한테 발탁돼서 달리기 선수로 나서게 된 하니. 여기서 주인공은 열심히 달린다. 엄마가 보고 파서. 캔디 같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천방지축 여자아이 주인공. 하니.
「달려라, 아비」는 아비가 열심히 달린다. 그런데, 아비가 계속 달리는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냥, 아비가 열심히 달릴 것으로 믿는다. 피임약을 구하러 약국으로 "뛰고 또 뛰었다. 상기된 얼굴로 장발을 휘날리며, 계단을 넘고, 어둠을 가르며 바람 따라 빨리."
그렇게 주인공을 만들고 그리고 아비는 떠났다. 달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그보다 빨랐겠지? 떠날 땐. 소설에서는 그렇다. 왜 떠났는지, 언급이 없다. 하니 아빠는 열사의 나라로 돈 벌러 갔는데. 이 아빠는 도대체 뭣 때문에?
다른 단편 「사랑의 인사」에서는 9살 아들을 놀이공원에 떼놓고 사라진 아비 얘기다. 여기서도 아비는 열심히 달릴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달려라, 아비'는 어딘가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열심히 달리는 아비라면, 여기선 그냥 사라졌다. 그런데, 다른 단편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에서 아버지는 집을 나간 게 아니다.
다 큰 딸 집을 찾아온다. 그리고 줄곧 텔레비전을 본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은 아버지가 보던 텔레비전 유선 케이블을 싹둑 자르면서, 아버지가 그들 관계를 그렇게 잘랐던 것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묘사한다. 그런다고 아비가 아비가 아닐까?
그런데, 「스카이 콩콩」에서는 집을 나간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큰 아들이다. 스카이 콩콩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만은, 여긴 선 엄마가 없다. 두 아들과 함께 사는 아버지라. 집 나간 아들 무사히 돌아오라고 고장 난 전봇대에 올라갔다, 그냥 내려온다. 여기서도 아버지 모습이 이렇게 그려진다. '그냥.' 경제적 능력이 없는 아버지야 그렇다 치고, 그렇다고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아버지라고?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에선 자기 탄생을 궁금해하는 아들에게, 썰을 푸는데 그게 상당히 은유적이다. 넌 그냥 엄마와 눈이 맞아서 밤을 함께 보내고 나니 네가 생겼어하면, 식상하다.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요즘 부모들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상상을 펼치게 하는, 그 아들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드는 아버지란. 그러고 보니, 이 소설집에서 제일 괜찮은 아버지다. 늠름하다.
아버지? 아버지라. 이 작가에게 아버지란 그냥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있는 사람? 누군가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없다? 없을 수가 없으니.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어미와 아비를 전제할 텐데. 정자 없이 난자만으로 생식이 가능? 이 소설집에 실린 가족이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 이때, '정상'이란 단어가 뭘까? 고정관념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아비가 비관적이거나 슬프게도 묘사되지 않다. 냉소적으로도 아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 작가의 진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여기까진 아비가 주인공인 듯하다. 그럼 나머지 단편은 작가 얘기 같다. 이 책이 처음에 만들어진 것이 작가가 25세였다고 한다. 그래서였을 것 것이다. 아래의 소설들은 그녀가 어떻게 작가로서 '숙성'되었는지 스스로 드러내 준다.
우선, 「나는 편의점에 간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우리 편의를 위해 편의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이 돼버린 편의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서울 상경녀의 특성?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런 그녀는 그저 편의점에 간다. 요즘도 자주 갈까? 지금도 가겠지? 현실을 거부하지도 않고, 넉넉하게 수용하지도 않고. 주인공은 "편의점에 간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뿐..."
이런 문장이 언듯 언 듯 주는 느낌은 아주 깊은 사색이 담기진 않았는데, 다 살아본 것 같은 작가 같다. 여전히 작가는 심각하지 않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방관도 부정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그녀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친 사람을 그저 바라본다. 그가 사고 난 여학생의 다리를 치마로 가려주는 장면도 그저 바라본다. 이게,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같다. 이런 식으로 작가는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왔을 것이다. 「영원한 화자」처럼.
「종이 물고기」는 대게의 작가들이 그렇듯이 스스로 작가임을 보여준다. 분명히 작가도 의식했겠지만, 그래서 작가가 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어떨까? 40이 넘은 나이가 되었을 텐데... 포스트잇을 한 장 한 장 이어 붙이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나하나 붙여나가는, 그렇게 이 소설 집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끊임없이 스쳐가는 생각들과 대화를 나눈 결실. 그러고 보니, 소설가는 역시나 「영원한 화자」 여야 할 것 같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세상에 대고 말이다. 소곤소곤 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