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연속적인 단절이자 고통

5년 전 겨울을 앞둔 어느 가을날 쓴 글

by 사월의 미도리

<Seori - Full Moon 을 들으며 생각나는대로 쓴 글>

추운 가을날 전봇대의 불빛이 차갑게 골목을 비추고 있을 때, 골목 사이사이의 찢어진 전단지들이 마음에 들어온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마음대로 붙여진 전단지들이 조각조각 바닥에 떨어져 하수구 밑에 들어가거나 아스팔트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골목에 위치한 LP 바에 들어가자마자 아주 오래된 책장을 열어보았을 때 맡았던 갱지 냄새가 난다. 존 레넌의 Imagine이 나오며 시간이 태엽처럼 감긴다. 우리는 노래 여덟 곡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정지화면처럼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만을 지그시 노려보며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문 틈으로 시린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답답한 공기가 시원하게 정화되는 듯싶다가 다시 문이 닫히자 더운 온기가 가게 안에 차올랐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던 우리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너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매정하고 또 따뜻할 것만 같은 너의 두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조심스레 적막을 깨는 너의 목소리에 우리는 퀭한 바람이 부는 골목길로 다시 나갔다. 밖으로 내뱉는 입김은 차가웠고 하얗게 피어오르다 금세 사라지는 너의 호흡이 붙잡아지지 않아 애가 탔다. 내 심장 박동수가 다시 빨라지며 썩은 동아줄 끝에 매달린 듯 불안했고 마구 흔들렸다. 큰 파동을 일으키며 나를 집어삼켰던 너의 파도가 다시 썰물이 되어 떠나간다. 수평선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온 세상을 가득 채웠던 너의 바다가 온갖 풍경과 소리를 만들고서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 내 발밑에서 멀어진다. 이별은 어느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든 어이가 없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온몸의 세포가 위험을 감지하고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온몸의 주름과 털이 곤두세워지며 둘에서 하나가 되는 상실감에 몸부림치고 몸 안에서 나를 이루던 오장육부 중 하나가 쑤욱 빠져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 한다. 젠장, 또 왔다.

나사가 하나 빠진 듯했던 연애. 한겨울 영하의 날씨에 만나 내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던 만남. 늘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고목나무처럼 위태로웠던 나. 나의 심장 박동 수는 늘 희미했고 나는 내 심장 박동 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너를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랑을 갈구했고 너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과 마음에 집착했다. 너에게 착하고 지혜로우며 결혼하기에 충분하고 마땅한 예쁜 여자이고 싶었다. 저녁을 먹지 않는 나는 먹은 것이 없어도 늘 술을 거의 매일 마셨다. 네모난 방 안에서 혼자 버텼던 것처럼 쳇바퀴 위에서 또다시 익숙한 생활을 이어갔다. 너의 전화를 매일 받는 것이 사실 고충이었다. 익숙함에 소중함을 잊은 것일까. 추운 날 밖에서 통화하는 나의 다리가 시렸고 나는 일부러 집 앞에 다 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네가 버스를 타고나서도 말소리가 모두 들리는 조용한 버스 안에서 민망함을 참으며 나와 전화를 이어갔던 것처럼 나도 추웠지만 이야기를 계속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은 줄 알았다. 보이는 것에 집착했기에 내가 너무 불안한 상태였기에, 지쳐갔다. 내가 더 좋아하며 시작했던 만남이지만 네가 비로소 나를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을 무렵에 나는 늘 따뜻하면서도 점선으로라도 결계를 친듯한 너의 정도(精度)에 지루해졌고 그 빈틈 속에서 시린 가을바람이 솔솔 불었다.

나는 너에게 쓰레기 한 조각으로 남았을 것이다. 너는 최선을 다했고 나보다 먼저 그리고 더 갑작스럽고 괴로운 상실을 경험했을 것이다.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후회하고 나 자신을 경멸했으며 나의 세계가 흔들릴 정도로 괴로웠다. 우리의 마지막 사진은 백색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지하철 승강장에서 눈물이 말라붙어 고목나무 같은 나의 노란 얼굴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흑백 사진을 보듯 멀찌감치 응시하던 너의 갈색 눈동자이다. 영하의 날씨보다 더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무거웠지만 가벼워졌다 우린. 아니, 너는.

결혼. 아니 만남. 사랑. 모든 것에 앞선 본질은 사랑.

그래서 이번 생에 사랑을 할 수 있는지가 본질이다. 결혼은 그다음에 자연스레 오는 것일 뿐. 하지만 주인공이 응당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한 보수를 달콤하게 받으며 사랑이 완성되는 시네마 속 사랑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 불가하다. 그건 자연의 섭리이다. 사랑은 고통이며 상실이고, 희생이며 연속적인 단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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