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것을 생각하자

by 사월의 미도리

벌써 아득한 기억 속에 내가 나의 삶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 나는 제정신이었을까.

누군가의 말이 날카롭게 들리고 그 말을 지나치지 못하고 곱씹는 나의 몹쓸 습관은 여전히 내 겨울나무에 걸려 있다.

아늑한 것을 생각해 보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방금 바른 립밤의 향과 내 눈물의 습기가 이불의 면 냄새에 폭신하게 녹아 아늑함이 풍긴다. 츄츄의 엉덩이에 얼굴을 박으면 꼬질꼬질한 강아지 털의 냄새와 아기강아지 살냄새가 코 깊숙이 퍼져 마음이 나른해진다. 주말 낮,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바깥에서 기다려야 하는 1호선 역 정거장에 서있으면 이윽고 겨울 햇살이 얼굴을 비춘다. 추위에 경직되어 있던 내 표정과 으슬으슬한 날씨에 한껏 올라가 있던 어깨가 햇살을 맞고 조금씩 이완된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다. 그 속도에 억지로나마 맞춰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민감한 신경을 가지고 있어서 불필요한 감정과 공기의 무게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왔다. 굳이 흡수하지 않아도 될 감성까지 혈관을 타고 심장 박동수가 늘 빨라지는 것을 보며 이건 저주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늘 현미경으로 꿰뚫어 보듯이 초 단위로 분석하며 느끼는 건 삶의 난이도가 부쩍 올라간 듯했다.

몇 천년동안 한 언어가 파생되고 발달된 다른 국가에서 살아가면서 깨달은 건, 그 나라의 언어와 내가 써지는 글의 언어의 어쩔 수 없는 모순과 언어들 간의 완전한 번역이란 불가하다는 좌절이었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 값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관계의 맥락을 품고 있는 언어를 다른 언어로 대체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그 나라의 언어로 살아간다는 건 다시 그 나라의 사람으로 스스로 태어나야 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모국어의 사고방식을 지닌 채 언어만 흉내 내는 건 어디까지나 이방인의 한계였다. 하지만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헐뜯고 모함하고 샘을 내는데, 언어의 한계가 관계의 절망으로 귀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남을 헐뜯고 미워하고 샘내지 않는가. 나도 분명 누군가를 나의 척도로 측정하고 넘겨짚고 판단하고 미워했다. 세상은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해야만 성립되기에, 매 순간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가는 우리는 감사의 찬란함을 빨리 깨우쳐야 한다. 하지만 감사와 만족은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것들에게 있어 늘 한계에 부딪힌다.

오늘도 글이 써지는 것에 감사하며, 안에 뭉쳐있지 않고 쏟아져 나온 글자들에 감사한다. 20대 그리고 30대를 지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한테 한결같이 친절하고 관대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질게 했거나 채찍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계절의 봄과 가을은 짧고 여름과 겨울은 자기 자신한테 친절하도록 두지 않기 때문이다. 숙명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용서하며 다정하게 구는 게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이제 그만 자야겠다. 눈썹 위 근육부터 벌써 이완되었는지 눈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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