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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의 미도리 Dec 14. 2020

프롤로그

사과를 베어물다

 빨간 사과를 씹으며 길가에서 기다린다. 새빨간 바지에 진한 청색 짐가방을 옆에 두고,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한 손에 이빨 자국이 선명히 남은 사과를 들고, 오른손에 핸드폰을 들고 이야기 중이다. 머리에는 백합과 닮은 백조 모양 머리핀으로 옆머리를 고정했다. 아무렇게나 대충 걸친 하얀 와이셔츠는 제멋대로 주름이 잡혔고, 마른 체격의 그녀에게 다소 큰 듯하다. 그녀 뒤로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그대로 수놓은 듯한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지나간다. 붉은 바지를 입은 그녀와 한 입 베어 물은 사과는 주변을 지나다니는 어느 여자들보다 멋이 묻어나는 느낌을 준다.  


 눈이 떠지는 시간은 대체로 일정하다. 다섯시가 조금 넘었거나 여섯 시에 가까워지는 시각. 잠이 정말 부족해지는 때면 내가 쓰러지겠지. 점점 잠이 없어지는 게 걱정이 되긴 하지만, 또 하나의 걱정을 만들지는 않으려 한다. 벽을 바라보며 잠시 누워있다. 창문에 기대어 자라난 나무 위에서 새가 앉아 운다. 울고 있다 기보다 말하는 듯한 소리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비교적 마음이 편하다. 아직 나에게 시간이 많이 주어져 있고, 내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 일어나 간단히 옷 매무새를 고쳐 입고 밖에 나가 걸어 볼까. 비 온 뒤의 공기, 나뭇잎에 스며든 습한 향과 거리 곳곳의 웅덩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잊어버렸던, 세상에 비가 오는 이유를 찾아 볼까. 인생의 절반가량을 부자연스럽게 살아온 발걸음을 비 온 뒤의 축축한 바닥에 조심스레 옮겨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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