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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의 미도리 Dec 16. 2020

숫자로 시작하는 하루


거식증의 발달, 일러스트 by Midori of April

 그녀의 하루는 숫자로 시작된다. 체중의 구체적인 소수점까지 그녀의 허용범위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물을 한 컵 마시고 사과 반 쪽을 먹는다. 그 후 삶은 야채와 요구르트를 먹기 시작한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을 특정 상황이란, 출장을 가서 호텔에서 숙박한 후 조식을 먹을 때나 초대받은 친구의 집에서 아침을 먹을 때이다. 이런 상황들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이 순서대로 식사를 해야만 한다. 많이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나는 아침에는 꼭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한다. 다리의 근육이 아파올 만큼 오르막길을 타고 나서야 그녀는 마음이 놓인다.


 낮 동안에는 비교적 기분의 높낮이가 일정한 그래프를 그린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시간에도 종종 탕비실에 있는 과자들이 나를 노려보는 듯하다. 당장 저 설탕 덩어리들을 꺼내서 입에 욱여넣여야 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무거운 울 원단들을 어깨에 메고 돌아다녀야 하는 때면, 다리의 온 근육이 빠지는 듯 힘이 풀리며 잠시 동안 어지러움을 견뎌야 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건강한 척하며, 힘줄이 나온 마른 팔들을 두꺼운 후드티로 숨긴다. 이내 참지 못하고 탕비실에 있는 과자 몇 개를 집어 들고 입에 넣는다. 먹은 것처럼 가득 입에 넣은 상태로 화장실로 달려간 뒤 모조리 뱉어내고 물을 내린다. 옆 칸에 동기가 있는 것 같아 휴지로 입을 깨끗이 닦아내고선 문을 열고 손을 씻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두꺼운 녹색 후드티 위로 살짝 보이는 누런 목과 앙상한 얼굴이 참담하다. 옆 칸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동기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나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사무실로 급히 돌아가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타 마신다. 컵을 든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낄 때  카페인이 온몸에 퍼지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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