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샀더니, 사람이 들어왔다.

“제가 도와줄게요. 오늘 월차 냈거든요”

by 신주


인생 처음으로 집주인이라는 생소한 타이틀을 달았을 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독일에서 평생 임차인으로만 떠돌던 나에게 집은 늘 잠시 빌려 쓰는 침대였고,

언젠가는 반드시 비워줘야 하는 서글픈 공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으로 내 이름이 적힌 열쇠를 쥐었을 때, 설렘보다 앞선 것은 묵직한 책임감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단 하나의 약속을 건넸다.


“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집'이 상처가 되지 않게 하겠다."


나만의 정직한 페어플레이였다.

가장 먼저 손을 내민 이에게 가장 먼저 문을 열어주는 것.


한 푼이라도 복비를 아끼려 직접 방을 닦고 사진을 찍어 독일 학생들이 즐겨 찾는 사이트에 올렸다.

“과연 연락이 올까?" 하는 의구심은 채 1분도 가지 않았다.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1분 간격으로 쏟아지는 알람 소리는 마치 내 새로운 인생을 축하해 주는 작은 연주회 같았다.


“역시 부동산은 입지야!"라는 이성적인 확신 위로,

한때 집을 찾아 헤매던 가난한 유학생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화면 가득 쏟아지는 간절한 문장들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첫 번째 메시지를 열었다.


거짓말처럼, 한국인 음대생이었다.


타국에서 갓 도착한 우리네 학생이 내 첫 집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다른 신청자들에게 정중히 거절의 답장을 보냈다.

“알려줘서 고맙다”, “행운을 빈다”는 다정한 인사들 사이로,

한 독일인 의대생의 문장이 오래도록 시선을 붙들었다.


“이번엔 닿지 못했지만, 나중에라도 꼭 저를 기억해 주세요.”


그건 방을 구하는 요청이라기보다, 낯선 땅에 뿌리내리려는 이방인의 처절한 고백 같았다.

그는 훗날, 정말로 나의 두 번째 세입자가 되었다.


열쇠를 넘겨주기로 한 날, 아담한 책상 위 프랑크푸르트 지도 옆에 작은 바구니를 놓았다.

초콜릿과 라면, 그리고 붉은 고추장.


‘이곳에서의 시간이 편안하길 바랍니다.’


그 짧은 문장을 적어 바구니 위에 살며시 얹었다.

30년 전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받고 싶었던 그 환대를,

이제는 내 공간을 찾아온 이에게 가장 먼저 건네고 싶었다.


학생은 쾰른에서 짐을 들고 기차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날 기꺼이 월차를 내고 중앙역 개찰구 앞에 섰다.


저 멀리, 작은 체구의 여학생이 제 몸집만 한 악기 가방을 메고,

양손엔 짐을 가득 든 채 위태롭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30년 전의 내가 환영처럼 겹쳐졌다.

빗속에서 이민 가방을 끌며 수녀원 문을 두드리던 스무 살의 나.

독일어 한마디 못 한 채, 텅 빈 거리 위에 홀로 서 있던 그 가녀린 뒷모습.

바구니에 담긴 고추장 하나에 목이 메어올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짐을 낚아채듯 실었다.

짐이 많아 기차로 몇 번은 더 오가야 한다는 학생의 말에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저 오늘 월차 냈어요. 같이 가요. 제가 도와줄게요."


당황해하는 학생을 태우고 한국 마트에 들러 김밥 몇 줄을 샀다.

그리고 그대로 쾰른을 향해 달렸다. 왕복 네 시간의 길.

우리는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차 안에서 음악과 인생을 이야기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늘 무언가 부족한 '마이너스 인생'이라 여겼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무언가를 건넬 수 있는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그녀는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밟으며,

가끔 기숙사 발코니에서 바이올린을 켰다.

공부에 지친 의대생들에게 그 선율은 가장 깊고 조용한 휴식이 되었고,

그녀는 어느새 기숙사의 작은 스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주 밥을 사주며 낯선 타국 생활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식사를 마칠 때마다 미안한 표정으로 지갑을 꺼내는 그녀에게,

나는 늘 같은 말로 그 손을 가로막았다.


"나한테 사주지 말고, 나중에 공부 마치고 후배들한테 많이 사주세요.

나도, 그렇게 받았으니까요."


그것은 30년 전, 빈손이었던 나를 기꺼이 품어주었던 이름 모를 친절에 내가 지불하는 뒤늦은 이자였다.


그녀의 졸업 연주회에 초대받아 연주를 듣던 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산 것은 차가운 벽돌로 지어진 집 한 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삶의 화음이었다는 것을.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인생에서 반드시 두 번 만난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가장 간절하게 연락해 왔던 독일 의대생이 들어왔다.

한때의 간절함이 약속이 되고, 그 약속이 다시 평범한 일상이 되는 기적.


나는 여전히 세입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고 임대료를 동결한다.

내가 먼저 넉넉한 마음을 내어주어야 타인도 내 공간에 편안히 머물 수 있다는,

인생의 정직한 계산법을 믿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갑과 을의 전쟁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뿌린 다정함이 돌아오는 삶의 터전이다.


30년 전, 화장실 하나 없는 좁은 방에서 외로움과 서러움을 삼키던 한 유학생은,

이제 누군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김밥 한 줄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집을 고른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비로소 ‘사람’ 답게
머물 수 있는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