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으로 만든 도움

다양한 형태의 세상의 도움

by 프랭크

사회적 도움을 고민하는 회사에 일하고 싶다는 바람이 늘 있었다. 여러 회사를 살펴보았고, 일해보았고, 지인을 통해 몇몇 회사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대부분의 회사는 접근성 문제를 풀고 있었다. 사업의 영역과 수익모델은 달랐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기술로 문을 열어주고자 했다. 가난하거나 교육 기회에서 멀어진 사람에게 작은 의자를 하나 내어주고자 했다.


때가 묻은 지금은 안다. 회사가 내세우는 사회적 기여는 종종 광고 문구였다. 회사의 대표들은 보통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는 큰 관심이 없다. 누군가의 막막한 방 안까지 들어가 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사업의 도구로, 적절한 순간과 장소에서 그 말을 꺼낸다. 뒤틀린 불일치 앞에서 여러 번 멈춰 섰다.


그러나 대표와 회사는 고객의 '불편한 삶' 자체에는 누구보다 민감했다. 사업의 맥락에서 누군가의 고통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유선이어폰의 불편함을 이해하여 무선이어폰을 떠올리는 사고 흐름과 같다. 회의실에서, 복도에서, 커피를 들고 걸으면서도 떠올린 문제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기능을 내놓는다.


진정성이 있든 없든, 그 결과로 누군가의 삶은 조금씩 나아진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단순한 선이 아니라, 겹겹이 엮인 실타래와 같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사회적 기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한때 선함에는 의지가 필수라고 생각했었다. 힘들지만 마음을 빚고, 그 마음을 포기 없이 전하고, 그렇게 서로가 어우러지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어떻게 지속될까. 의지를 꾸준히 가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에서 나와 다른 이의 시선을 익히고, 세상의 신호만을 쫓지 않고 잡음에서 의미를 찾는 훈련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의도와 결과는 늘 함께 가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여울목 같은 먹먹한 틈이 있어 흘러가거나, 머물거나 사라진다. 가고자 했던 결과에는 다른 의도가 도착해 있다.



나는 일정 기간 일한 뒤 회사를 떠났다. 내 의문과 상관없이 개인의 상황과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의지도 그만큼이었던 것 같다.


회사는 여전히 사업을 이어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홍보용으로 내세웠던 지향점이 점점 진정성을 획득해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회사 내부가 변한 것은 아니다.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업 활동이 여전히,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묘한 감정이 든다. 의도는 거짓일지라도 결과는 사실일 수 있다. 반대로 내 의도는 진실이었으나 결과는 거짓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의도마저 거짓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내가 사회적 기여라는 콘텐츠를 그저 즐기는 소비자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한다.



어릴 적 방에 혼자 있던 날, 친구 어머님이 찾아오셨다. 친구와 함께 레슬링 경기에 데려가 주셨다. 맞벌이 부모님과는 이미 연락해 두셨던 눈치였다. 경기장의 환한 불빛과 함성이 아직도 기억난다. 동네를 벗어나서 놀아본 적 없던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운 좋게도 그런 기회가 내게는 몇 번 더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기여하는 회사를 찾고 있었을까? 이 질문을 할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다.


잠시 멈춘 요즘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내일부터는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할 수 있는 것’을 살펴보아야겠다. 비용을 치를 용기를 조금 더 내야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순간 속으로 스스로를 더 깊이 밀어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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