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
주의) 일부 책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명확히 끝이 정해진 이야기다.
한 가족이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 유언으로 부탁했던 고향에 안장하고자 고된 길을 떠나는 여정.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어느 감상의 서랍에 넣어둘지 정하지 못했다.
삶을 대면하는 진지함일까, 공기에서도 색을 읽어내는 섬세함일까,
아니면 씁쓸하게 웃긴 블랙코미디일까.
이 소설은 사건의 개연성이나 연속성으로 흥미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대신 읽는 동안의 낯섦 — 그 묘한 불편함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진흙에 박힌 나무판자를 끌어내기 위해 새끼 동앗줄을 잡아당길 때의 껄끄러움.
진흙은 현실이고, 나무판자는 희망이다.
힘껏 잡아당기고 있지만 왜 꺼내야 하는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포크너는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선을 교차하며 작품 속 시간을 흘려보낸다.
사건은 각자의 해석 속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겹쳐진다.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순간마다 다르게 감각하고, 다른 지점을 응시한다.
마치 우리가 흔히 범하는 착각, 타인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같은 부분을 중요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류를 갖고 있는지 떠올리게 한다.
결국 고단함은 혼자만의 것이다.
말똥가리는 한참 만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 자신처럼 둔하고 무거우며, 비 기운이 가득한 공중으로 날아갔다. p.136 샘슨
한번은 내가 깨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도 느낄 수가 없었다. …. 바람은 다시 내 밑에서 차가운 비단 조각처럼 발가벗은 다리를 스쳤다. p.139 듀이 델
아랑곳하지 않고 캐시가 말한다. “균형이 맞지 않아. 조심해야 한다.” p.166 달
책에서 각 인물은 의식의 흐름까지 담아내어 묘사된다.
현실에서 하나의 일을 생각할 때 연상되는 기억들, 사건들처럼 각자가 떠올리는 과거의 회상, 미래의 기대를 함께 알 수 있다.
가족 각자의 상황과 속내를 아는 입장에서 등장인물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한 응원이나, 공감이나, 미움을 갖지 않게 되어버린다.
되려 인물 간의 누적된 감정을 알아가고 평소의 행동을 알아가는 입장에서 결국에는 사람의 관계라는 것 자체에 신물이 난다.
사회에서의 형식적 관계가 친절한 관계에서 목적의 관계와 무책임의 관계를 알아가는 시간과 맞물려 보이는 부분은 내내 불편하다.
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입을 우물거리면서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다. “다리가 멀쩡하다면 그 위로 건널 수 있을 텐데.” 그가 말했다. p.145 툴
이제야 얼굴에 씌웠던 뚜껑을 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눈은 멍청하기도 하고 희망에 가득하기도 하고, 동시에 실망을 감수할 듯한 태도로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p.231 모슬리
“더 좋은 곳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달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더 좋은 곳!” 웃느라고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끔찍했다. 정말 끔찍했다. 웃을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 그러나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난 확신할 수 없다. 난 확신할 수 없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274 캐시
종반부 삶을 마감한 가족의 엄마, 애디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마저도 우리는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개인의 경험과 겪은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떠올려 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애로웠던 아내이자 엄마, 여러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고 떠나는 애틋함.
누군가는 평생 자기연민하며 책임감 없는 이, 비교와 이기적 행동.
그녀는 죽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삶을 감각할 수 있으나 의미는 평생 찾지 못할 것을 직감한 사람이었다.
“말이란 전혀 쓸모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말하려고 하는 내용과 내뱉어진 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캐시가 태어났을 때, 모성이란 말은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가진 엄마는 그런 단어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p.198
“앤스를 죽이고 싶었다. 종이 장막과 같은 언어 안에 자신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등 뒤에서 장막을 뚫고 나를 때리는 것처럼 내게 속임수를 쓴 듯한 느낌이었다.” p.198
“보복하기로 했다. 내가 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숨기는 것이 바로 보복이었다.” p.198
“그리고 그는 죽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말과 행위가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말은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를 찾아 헤맨다.”
가족의 여정은 그녀의 보복이었다.
여정을 마친 가족은 그리 슬퍼 보이지 않다.
이들 가족에게 여정은 단지 절차였을 뿐인 듯하다.
여정과 가족과 관계는 사회적 형식의 관계로 읽혀지기까지 한다.
책을 읽고 난 뒤 씁쓸한 요즘 시대의 질문이 떠올랐다.
“누가 낳아달라고 했나.”
그러게, 무엇을 위해 우리는 세상에 던져졌을까.
100년 전 시대에 끊임없이 맴돌았던 실존에 대한 질문, 여기에 답이 필요한 시대.
나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그리고 아마 요즘 시대의 현명한 답변,
"왜 굳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까?"
이러한 여유가 허락되는 시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