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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신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대체 무엇을 통해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인정하게 된다면 인간은 오직 그분의 계율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만을 쫓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에게 심겨 있는 자유 의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인간에,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인간이 신을 존재시킨 것이라면 인간은 아무런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은 채로 지극히 자유롭게만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이 지구 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신을 인지하고 경배하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인간이 없는 신이 존재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신이 없는 인간 또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것만을 두고 본다면 신과 인간은 ‘필요하면서도 충분한 조건’의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게 되고 또는 인간의 정신적인 작용이 신을 존재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되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오해의 틈을 발생시키게 되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하는 신성의 문제이다.

어쨌든 조금만 생각의 방향을 조금 틀어본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신이 인간에게 정신계를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자신이 신이란 것을, 자신의 권능을, 자신이 만물을 만들어낸 창조주임을 인지하도록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에게서 받은 ‘정신계에 대한 탐구 능력’으로 신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 능력으로 인해 물질계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 중에 최상위의 계층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인지와 의지는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사유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뿌리이자 둥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유의 가지 끝에는 대체 무엇이, 어떤 것이 매달려 있는 것일까. 사유에 사유를 거듭하다가 보면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존재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이 거기에 있을까. 삶이란 게 어디가 종착점인지를 결코 알지 못하듯이 사유의 끝 또한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의 사유는 신이라고 불리는 절대자의 존재 여부와 그 존재에 대한 근거를 찾으려는 것으로만 귀결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라는 인간의 삶은 오직 물질계의 영역으로만 국한될 것이기에 정신계에서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사유하는 인간에게 정신계에서의 위치를 상실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신비로운 생명체의 존재 자체를 근본적인 질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것이다. 인간은 원래 자기 필요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번복하기를 당연시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인간의 존재가 단지 물질계에서만 해당하는 것이라면 사유하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유란 것이 물질계를 헤집고 다니는 한낱 방랑기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사유가 던지는 숱한 질문들이 정신계의 활동이 아니라면 대체 그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길을 잃으면,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의 존재는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 바람과도 같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가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의 행위와 사유는 단지 허무한 몸짓과 헛된 망령 쫓기일 수밖에 없게 된다.

허무주의는 두려움을 잉태하기 마련이고 두려움은 절대자를 찾고 인식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 정신의 작용이란, 태초부터 삽입되어 내려온 암시들이 재귀적으로 돌고 돌아가며 칠흑의 밤길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구원의 행위이기도 하다.


밤이 깊어 간다. 밤은 자연의 시간이며 신의 시간이다. 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정신계와 소통하는 시간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정신계를 향하는 길을 나서야 한다. 신이, 진리가, 지혜가 저곳에 있기에, 비록 잔걸음질일 뿐이라 해도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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