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혼자 떨어지게 될까 봐, 그것이 비록 얇디얇은 한 겹의 그림자일 뿐이라 해도, 어떻게든 부여잡아 보려고 손을 뻗어 본다. 다행이다. 빈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위안을 찾을 수 있으니.
이제 손을 접어 바지 주머니 안에 질러 넣는다. 체념이란 단어가 뿜어내는 향기가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다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길을 걸으며
늘 비어있다
그러니 허전할 수밖에
그래서 서성이게 된다
이것을 운명이라 여긴다
길을 나선 걸음은 쉬어갈 뿐
어느 곳에서도 멈춰 서지 않는다
길게든 짧게든 쉬었다가
다시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 왜인지는 모른다
가다 보면 간혹, 유독 걸음을 서성이게 만드는, 그런 곳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이 본능을 향한 인력 때문인지, 주저함이 밀어내는 척력 때문인지, 호기심이 지닌 흡입력 때문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어찌 되었든, 그 서성임으로 인해 걸음이 더뎌지긴 해도 결코 너무 늦어지기 전에 그곳의 문을 밀고 다시 길 위로 나오게 된다. 들어서야 할 때는 제대로 몰랐지만 나와야 할 때는 어떻게든 알아차리는 것은 아둔함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지금 걸음을 디디고 있는 이 바닥이 어딘가를 향하는 흙길인지, 어느 들판 가운데에 난 풀길인지, 어느 산의 바위 틈새인지를, 발바닥의 촉감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어떤 실마리조차 찾아낼 수 없는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결국에는 본능이 가야 할 길을 알아차리게 해 주는 법이다.
분명하지 않은 것인데도 이것이 길이란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어떤 길은 사람의 영혼에 새겨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의 태초와 인간의 태초부터 유전되어 온 운명이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혹시 자신의 운명에 끼어들 아주 작은 틈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까지 걸어온 지난 길이나, 내일 걸어가게 될 새로운 길이나, 그리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어느 하늘을 지붕 삼아 삶의 거처를 마련할지와, 뿌리 깊게 내렸다고 여긴 땅바닥을 어떻게 옮기느냐 같은 사소한, 그러나 크게 어려울 수도 있는 달라짐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것만이 있을 뿐이다.
어제란, 어제와 그 어제 그리고 그 어제의 어제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어제의, 이미 정해져 버린 날의 집합이다. 반면에 내일이란 무한이 존재할 것 같은, 또는 무한히 존재하길 바라는 내일의 정해지지 않은 날의 집합이다.
그러니 어제의 사소했던 것이 언젠가의 내일에는 커다란 것이 되기도 하고, 어제는 가슴 졸이게 했던 그것이 언젠가의 내일에는 평온을 주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란 촉매가 일으키는 기억과 믿음에 대한 변성 작용 때문이다.
어느 사이 숙소로 돌아왔다. 시간의 개념으로 보자면 지나간 오늘의 언젠가에, 오늘이란 길에서 내려섰다. 이제 오늘을 어제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시간이다. 늘 그래 왔듯이 배웅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괜한 근심을 만들만한 것들을 굳이 잠자리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제의 일은 언젠가 적당히 채색될 것이고, 아무리 애써본들 방향 없는 내일의 일을 미리 챙기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