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그들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절대적 존재>를 추종하게 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그들에게 <절대적 존재>란 불완전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자연에서의 무엇' 중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경고하며, 판결하고 벌을 주며, 축복하고 돌봐주는, 물리적으로는 직접적인 대면이 어렵긴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인지한다고 믿었던, 절대적 권능을 가진 영험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들이 세상에 출현한 태초의 아주 초기부터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막연한 경외심 또는 혼돈이 그들이 <절대적 존재>를 추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라는 '인간'의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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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인간의 인지적, 철학적 사고능력의 향상은 이 <절대적 존재>란 게, 이 세상을 예비하고 창조하였으며, 원시 태초부터 이 세상을 관리해온 <신(God)>이란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날 이후, 신성에 귀를 기울이고, 신성에 기인한 세상의 원리를 추적하며, 신의 대리인이자 제사장으로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무리를 이끌 의무와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나타났고, 그들이 신을 대리하여 인간의 무리를 끌어갔다.
이 <절대적 존재>에 대한 사피엔스 사피엔스적인 사유는 점차 신성적인 문제와 철학적인 문제라는 두 갈래 길로 나뉘어 진화하게 된다. 그 진화의 결과물인 <신학>과 <철학>은 한 뿌리에서 올라와서 같이 자라다가 갈라져 나간 두 개의 줄기인 셈이다.
따라서 <신학>과 <철학>은 결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충분조건이나 포함 관계에 있질 않고, 어떠한 시야로 서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철학적 신학>과 <신학적 철학>의 형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둘에 대해서 얘길 하게 되면, 세속의 귀에는 괘변처럼 들릴 수도 있을 만큼, 아주 복잡하고 기묘하기 짝이 없어 행여 실없는 이로 비칠 수 있다.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어느 정도를 받아들이느냐, 의 정도는 믿음을 가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다르고, 얼마만큼의 <철학>과 <신학>에 대한 지식을 가졌고,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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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것들에 대해 간단히나마 얘길 하자면 다음과 같다.
<철학>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의 영역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신학>은 믿음이라는 추상성의 영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것은 "비록 복잡한 면이 있지만 이성적이긴 하다."는 것이고, 추상적이란 것은 "간단하지만 비이성적인 면이 있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과 <신학> 사이에는 애초의 연결고리가 존재하듯이,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여기에는 "간극이 무엇이냐."는 간극의 실체와 "간극이 넓으냐 좁으냐"와 같은, 단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아주 복잡한 문제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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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신학자>와 <천한 철학자>는 그 간극을 더 크게 벌린 <허위의 공간>을 만들고선 그 안에서 ‘신성’과 ‘세상의 본질’을 찾았다고 일반 대중을 선동하고 현혹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선동에 넘어간 이들이라고 해서 단지 '우매하기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우매함은 <개인이라는 소개체>가 무리를 지어 형성하는 <대중이라는 대개체>에게 유전되어 내려온 하나의 속성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현명하다고 하더라도 일단 대중이라는 무리 속에 갇히게 되면, <선동과 현혹>이라는 작은 당근에도 침을 흘리며 쫓아다니게 되는 것이, 바람 앞에 선 마른 갈대와도 같은 우리라는 인간이 가진 본성이다.
그들의 공허한 선동과 현혹은 철학과 신학을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만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태초의 케이아스 속에서 부족함을 내재한 채 태어난 우리 인간은 그것을 제대로 구별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