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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들어서기

경계 들어서기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는 결코 허물수 없을 것만 같은 자신만의 경계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경계를 가만히 더듬다 보면, 대게의 것은 한 단으로 쌓아 올린 방벽이거나 한 겹으로 가려 놓은 막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것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두께를 가졌다는 것 또한 알 수 있게 된다.

두께를 가진 경계의 경우에는 그것의 두께나 그것의 재질에 따라서는 그 너머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힘들어지거나, 아예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그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떤 틈을 찾으려 노력하거나, 들여다볼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을 찾아 나서거나, 그 경계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그 너머를 들여다보려 한다는 것 또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더욱더 알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법이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아는 것’이 되는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식을 갖추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에는 두께를 가진 경계를 들여다보려는 끈질긴 행위는 지식에 대한 욕심이 일으키는 것이며, 그 욕심은 앞으로만 달리고 싶은 자신이 만들어 낸, 오직 자신에 의한, 자신만을 위한, 자신만의 당근과 채찍이 되는 것이다.


경계의 앞에 서서 조차 지식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니, “오직 지식만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젊은 날의 어느 날엔가 지어낸 신념이 아니라, 비록 지금은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느 경전에 새겨져 있던 누군가의 말씀이었던 것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진다.

쌓여가는 지식의 더미는 때로는 지혜의 눈을 멀게 만들기도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 만물에게서 찾아지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 이중성 또는 양면성인 것이다.


모든 ‘정(正)’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곁에는 그것의 ‘부(負)’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상의 절반은 정에게 속해 있고 나머지 절반은 부에게 속해 있다. 정과 부가 만나는 경계지역에는 ‘합(合)’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의 크기는 그것을 생성해낸 사람이 가진 지식의 질과 양에 따라 크게 다르게 된다.


합의 일부분은 정의 영역에 걸쳐 있고 나머지 부분은 부의 영역에 걸쳐 있다. 합은 자신만을 위한 배타적인 영역을 별도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합은 정이면서도 부이고, 정도 아니면서 부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과 부는 완전히 다른 것이긴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때론 그 경계의 간극이 너무 넓어지게 되면 정과 부는 제대로 된 서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가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합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혜를 늘린다는 것은 정과 부의 극적인 대립 속에서 합의 영역을 넓혀가는 행위이다. 하지만 합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의 영역을 넓힐 수 있을까. 경험과 글을 통해 지식을 쌓아간다면, 쌓이는 지식만큼이나 합의 영역이 넓혀지게 될까. 그만큼 지혜가 늘어가게 되는 것일까.


어느 한자리에 매김 되기보다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색과 걸음으로 마주친 질문과 현상에 스스로의 정신과 몸을 기꺼이 던져 넣어 그것의 실체를 쫓아다니다가 보면, 정과 부가 만나는 경계의 간극 속에서, 합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걸음을 어찌어찌해서라도 디뎌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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