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삶이란 게 랭보와 브레히트의 시 몇 편을 책상 위에 마구 흩트려 놓고, 손길이 가는 대로 한 편씩 집어 읽어 내려가는 아주 늦은 어제의 밤이거나, 너무 이른 오늘의 새벽인 것 같이 먹먹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또한 허락된 것들과 금지라는 울타리 안에 밀어 넣어진 온갖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인생의 치열한 포화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에 의해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은, 눈에 보이거나 볼 수 없는 어떤 개체와 그것과 연관된 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현상이 아무런 경계 뒤엉켜있는 혼동의 상태가 삶이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의미를 부여받은 개체란 것이 브레히트가 말한 것처럼 '강해서 살아남았고 그래서 슬프지는' 안타까운 것들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궁금하다. 대체 의미를 가진 그 무수한 개체들의 중심에는 무엇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우주의 만물을 통 털어 유일한 존재인 나 자신이 만약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 것일까. 비록 무엇인가가 남는다 하더라도 내가 없는 세상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나의 부재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면 내가 바로 의미를 지닌 모든 개체의 축이고 중심은 아닐까. 이 생각에 조금이라도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이 생각이 한낱 무책임한 사고의 쓸모없는 배설물에 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색의 숲길을 조금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우리라는 인간 개개인은 현실의 공간을 살아가는 물리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비이성적인 공간에도 존재하고 있는 정신적이고 비물질적인 개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소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을 통해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정신적인 회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태초의 상태란 어떤 것일까. 태초의 상태란 건 궁극적으로는 오직 신神이라 불리는 창조주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하게 빈 것은 아니지만 분명 비어있는 상태이다.
인간에게 있어 이러한 세상의 태초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완전히 부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의 상태로 회귀한다는 것이 된다.
하긴 인간 또한 태초의 무無에서 온 것이 다시 그 무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에 대해 다른 어떤 언어적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수 있다. 없던 것이 어느 날 존재하게 된 것이 세상이고 인간은 그중에 하나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던 태초의 세상에 온갖 만물이 나타나고 그것들은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길고 긴 케이아스(혼돈)의 시간과 격변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습을 갖추고 자리를 잡아 나간다. 인간 또한 그 시간과 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과 자리를 잡은 것이기에 인간의 내면에는 그때의 혼돈이 새겨져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렇듯 혼돈은 인간의 내면에 유전되어 내려온 것이기에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기술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쾌락을 포함한 금지된 것이 주는 즐거움과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에 대해, 불가해하게도 중독되는 일이 벌어지는 원인이, 태초의 무를 평정하고 기나 긴 케이아스 속에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만들어낸 창조주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지어보는 것도 인간이기에 할 만한 괜찮은 일인 것이다.
by Dr. Franz KO@New York(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