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쾌감이나 희열, 전율을 나타내는 외래어 정도라고 여기고 있는 카타르시스(Catharsis)는 정제(精製, purification), 정화(淨化, clarification), 정죄(淨罪, purgation or cleansing)를 뜻하는 그리스어 κάθαρσις(katharsis)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따라서 그 뜻만으로 보자면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 또는 정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타르시스를 이 정도로만 해석하기에는 어딘가 크게 부족한 것 같다. 그것은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 해석이 단지 언어적인 기원만을 따진 것일 뿐이라서, 카타르시스 자체를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질 좋은 그릇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카타르시스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의 명확한 [정의]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것은 이러저러하다."거나 "그것은 이런저런 배경을 갖고 있다."와 같은 [주변의 접근을 통한 산발적이지만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대개의 경우 카타르시스는, ‘특정한 의미를 가진 특정 행위’와 ‘그에 대한 특정한 기술’의 형태로 표현하게 된다. 카타르시스는 특히 예술이나 문학작품, 드라마나 영화, 연극이나 뮤지컬 등의 어떤 상황에서 감정의 극단적인 변화를 통해 재생(renewal)과 회복(restoration)을 초래하는 연민(pity)이나 공포(fear)의 발현과, 그를 통해 쾌감이나 희열, 전율을 느끼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심리적 측면에서의 카타르시스는 스스로에 의해, 또는 타인이나 이성적 테두리에 의해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감정, 행위적인 표현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내면을 바깥세상을 향해 방출함으로써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도구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러한 심리적 측면에서의 카타르시스가, ‘카타르시스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높이’이고 또한 그러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인지이기도 하다.
특히 비극을 소재로 한 공연에서 시각적인 자극은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전달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관객은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불안감과 우울함, 긴장감과 슬픔을 해소시켜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던 억압된 찌꺼기들을 세상 밖으로 분출할 수 있게 된다.
*** ***
카타르시스는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시학(the Poetics, 詩學)에서 사용한 메타포(metaphor)로 관객의 마음에 미치는 비극의 영향을 카타르시스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비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관객에게 미치는 가장 중요한 작용 중에 하나]이며 [카타르시스야말로 비극의 백미]라고 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작품들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 꼽히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가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이라 꼽히는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십이야>, <뜻대로 하세요>(학자에 따라서는 <뜻대로 하세요> 대신에 <헛소동>을 꼽기도 한다.) 보다 더 오랫동안 가슴에 남겨지게 되는 것도,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적인 본성이 희극에서보다는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특성 때문인 것이다.
*** ***
그것이 원죄로 인한 것이건 또 다른 이유로 인한 것이건, 인간은 비극을 내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비극적인 존재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 개개인은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비극 작품의 주연으로써의 삶의 무대에 오르거나, 때에 따라서는 주연은 아닐지라 해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등장인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은 자신이 공연 중인 무대를 진지하게 또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건 어느 개인의 삶의 공연에서건, 비극을 인지한 관객은 주연 또는 다른 등장인물이 빠져 버린 비극적 상황을 통해 일종의 ‘부정적 상황으로 인한 긴장과 이에 따른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작품 속의 비극을 통해 유발된 ‘두려움’은 점차 자기 자신의 두려움으로 전이되어 비극적인 상황에 빠진 인물들을 향한 ‘연민’의 감정을 일으키게 되고, 이를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의 무기력함 또는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적 또는 정신적인 반응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인식하게 되는, 최면이 걸린 것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받아들인 비극적인 상황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관객은 자신을 가두었던 이성의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고 쾌감이나 희열, 전율을 통해 비로써 영혼의 자유를 얻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자유의 순간이 바로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글쟁이의 입장은 심리학자나 사회학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괜한 것에 대해서도 쓸데없이 생각을 많이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는 ‘이성적인 말빨’이 센 사람인 반면에 글쟁이는 ‘감성적인 글빨’이 센 사람이라서, 글쟁이는 카타르시스에 대해 좀 더 [감상적인 가치]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글쟁이라는 사람은 카타르시스를 현실에서의 현상이나 상황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실체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인간 영혼의 밑바닥에는 검은 비극이
달빛 없는 밤에 내린 차가운 안개처럼 무겁게 깔려 있지
영혼의 바깥으로 그 안개를 밀어 내기 위해서는
[아침의 하얀 호수]를 찾아가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언젠가부터 말에서 말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해
이 이야기가 비극적이라는 건,
오직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만이
그 호숫가로 이어진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겨우 구분해낼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일 거야
어쩔 수 없어,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해
추방자만이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그것은 원죄를 저지른, 그래서 낙원에서 쫓겨난 자와
그 후손에게 대대로 내려진 형벌에서 기인한 것이니깐
[아침의 하얀 호수]에 뽀얀 안개를 피우는 물은
아주 깊고 뼛속까지 얼려버릴 만큼 차갑다고 해
그래서 설령 그곳에 다다르게 된다고 해도
오직 무모한 자만이 그곳에 뛰어들 수 있어
머릿속을 마비시키던 싸늘함이 심장까지 파고든 그때,
내면에 깔렸던 검은 안개를
호수의 수면을 덮고 있던 하얀 안개가 몰아내버리고
그때에야 머뭇거리며 멈추어 섰던 동녘 빛의 상승을
미소 지은 얼굴로 허락할 수 있게 된다고 해
by Dr. Franz KO@New York(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