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애초부터 ‘물질적인 삶에서의 나’와 ‘이성적으로 실존하려 하는 자신’, ‘감상에 쉽게 휘둘리는 형이상학적인 자아’라는 '나와, 나이길 바라는 나, 그리고 나이지만 내가 아닐 수도 있는 나' 사이에서 서성거리며 살아가도록 예정되어 있는, ‘현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성적이면서도 감상적인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다.
그것의 이유가 무엇인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많은 얘깃거리와 논쟁거리가 찾아지겠지만,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인간과 세상의 부족함과 불완전성>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이 이렇다가 보니 <그리스 신화>라는,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 지어낸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이야기 속의 신들 또한 어느 누구 하나 완벽하지 못하며, 부족하다 할 정도로만 이성적이면서도, 적당하다 할 만큼만은 감성적인, 인간의 속성을 닮아 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앞 뒤 어긋나고 기괴하기까지 한,, 그래서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신들의 행위를, 인간은 오히려 너른 아량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완벽함이란, 도달할 수 없는 태초의 땅을 넘어, 무지개 저 편쯤이나, 신화 속 어느 구석에나 설치되어 있을, 상징적인 장치에 새겨놓은 한낱 작은 표식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완벽함이란 것은 신화 속의 신을 넘어 선 [절대 신]에게서나 더듬을 수 있는 것이기에,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신화를 현실이라 믿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족함을 안은채 미완성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은, 어딘가를 기웃거리면서,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경계를 서성여야 하고, 때로는 고독과 슬픔에 빠진 자아를 스스로 다독 거리야 하고, 부조리에 잠식당한 방향 잃은 자존감을 어떻게라도 끌고서, 종착지 모르는 멀고 먼 길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걸어가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여겨야만 하는 불안정하고 안타까운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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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기만 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있어, 인문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어떤 의미를 가졌기에 인간은 인문학에 빠져드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인문학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이라거나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문화’ 또는 ‘사물과 세상의 목적과 가치를 인간적 입장에서 규정하는, 인간과 인류 문화에 관한 모든 정신과학’과 같은 사전적 의미나 규정, 학자들의 주장에 눈과 귀를 닫아 버린다면 인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옥스퍼드 레퍼런스의 정의처럼 ‘인간의 문화, 특히 문학과 역사, 미술과 음악, 철학에 관련된 학문이나 문학’을 인문학이라 한다면 그 범위를 너무 넓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제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부족함]을 창조 과정에서의 미필적 고의로 인한 ‘미완성’의 결과물이라 한다면, 인간의 존재란 게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의도된 ‘비 완성’ 때문이라고 한다면 애초의 의도가 무엇을 예비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 아직 그 어느 누구도 답을 찾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부족함이 미완의 결과물이건 비완에 의한 것이건, 인문학을 ‘인간과 세상의 부족함을 인지한 이에 의해 행해지는 철학적, 문학적, 예술적, 문화적 추구 행위와 거기에서 발생하게 되는 정신적인 유희'라고 한다면 어떨까.
또한 인문학을 'insufficiency tolerance' 또는 'shortage tolerance', 즉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의 부족함을 허용하고, 이를 포용하려는 가장 아름다운 지적 행위이자 본능에 남겨져 있는 이데아의 흔적을 찾아가려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