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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방관자가 되기 위해

진정한 방관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다 보면 때론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방관자인 것 같이 느껴지거나, 방관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방관](傍觀)을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것’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그러니 [방관자](傍觀者)는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방관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무 한 측으로만 기울어져 풀이되어 있는 이것에 대해 조금 더 신중한 고찰이 필요하다. 방관자란 게 ‘곁에는 있지만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자’ 인지 또는 ‘곁을 지키면서 함께 지켜보는 자’ 인지에 대해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긍정적이지 못한 것은 대게가 부정적인 것에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방관]이란 단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 傍觀者效果) 또한 그런 것들 중에 하나이다.


사실 [방관자 효과]라는 용어에서 방관자라고 번역되고 있는 bystander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면 [방관자 효과]라는 용어가 국어사전에 버젓하게 등록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bystander라는 단어는 [구경꾼]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서 보면 [구경꾼]은 ‘구경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이고 유의어로는 관람자, 관람객, 관객 등이 있다. 이에 반해 [방관자]란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즉 [구경꾼]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방관자]라는 단어에는 ‘현재의 현상이나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거나, 관계가 있었거나, 관계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암시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두 개의 단어 [구경꾼]과 [방관자]는 얼핏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단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이유로 [구경하는 사람]을 [방관자]라고 번역하게 된 것인지, 물론 어떤 구경꾼은 방관자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구경꾼을 방관자라고 할 수는 없기에, [방관자 효과]에 대한 누군가의 이 번역은 [방관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몸에 맞지 않은 옷에 끼워 넣은 것 같은 심각한 우를, 의도된 것이든 어떤 실수로 인한 것이든 간에,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bystander effect는 [방관자 효과]가 아니라 [구경꾼 효과]로 번역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방관자]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을 위해서는 먼저 “곁에 있다.”는 것과 “곁을 지킨다.”는 문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두 개의 문장에서는 수동과 피동이라는 의미적인 차이뿐만이 아니라 행위적인 차이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 ‘타인에 대한 방관자가 되는 것’과 ‘자신에 대한 방관자가 되는 것’에는 ‘피상적인 쳐다보기’와 ‘적극적인 지켜보기’라는 ‘참여의 방법과 정도’라는 차이가 있음과, “적극적으로 지켜본다.”는 것은 “진정성을 갖고 지켜본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방관자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스스로에 의해 훈련이 잘된 방관자로 거듭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진정한 방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많은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것들이라서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기술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중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는 생각하기와 글쓰기, 여행하기에 능해지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능해지는 것’이란 단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탁월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능해지는 것이 익숙해지는 것의 뒤에 오는 것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익숙해진다고 해서 꼭 능해지는 것은 아닐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일이다.


사위가 어둠에 잠긴 늦은 밤 또는 이른 새벽, 좁은 탁자 위에 놓인 조도 낮은 등불 아래를 묵묵히 지킬 줄 아는 여행자는, 실내를 부유하는 미세한 입자의 움직임과 그것을 따라나서는 사색의 발걸음을 세세하게 더듬을 수 있어 [볼 수 있는 자]이자 [느낄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훈련이 잘된 방관자는, 그것이 비록 여행지라 하더라도, 누구보다 자신의 주변에 늘려 있는 사물과 그것과 연관된 현상을 섬세하게 살펴볼 수 있고 그것들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작은 변화조차 놓치지 않는 [진정으로 생각할 줄 아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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