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나 혈액형, 외모에 대한 편견과 같이 자연계를 살아가고 있는 누구나가 특정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는 편견을 갖기 마련이다. 인간의 편견이란 일차적으로는 선천적 본능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지만 또한 학습과 경험 같은 후천적 요인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편견이란 특정 집단에 대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는 태도’라고 한다. 이 문장을 텍스트의 조합 그대로만 받아들이게 된다면 편견에는 어떤 부정적인 의미가 관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있어, 대개의 경우, 편견이란 대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자신의 직간접적 지식과 경험, 그리고 그것들의 연상작용에서 기인하게 된다.
또한 편견은 개인적이기 하면서도 집단적이고, 시대와 문화, 지역적 환경에 따르는 지극히 가변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편견은, 그 자체로서도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다룰만한 줄기 굵은 주제임에 틀림없어 보일 수도 있다.
영역을 조금 좁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편견은 심리 학자들이 다루는 편견이나 일반인들이 말하는 편견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술이란 물질계에 존재하는 재료를 통해, 관념이나 추상, 현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비물질계를 표현하기에, 예술가의 작품 속에는 예술가의 개인적 편견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고 예술가의 이러한 편견은 창의적인 결과물로 나타나게 된다.
어쨌거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 상에는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어쩌면 헤아려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서재 책상 위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갓 내린 커피가 조막만 한 에스프레소 잔에 담겨 연갈색의 뽀얀 포말 띠를 두르고 있다.
물질계의 재료인 커피는 ‘커피에 더해진 편견’의 연상 작용을 거치면서 형이상학적인 현상을 이끌어낸다. 이 갈색의 작은 웅덩이에는, 그때 그곳에 있었던 것과,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것, 그곳에 있었으면 하는 것이 구분 없이 섞여, 추억이란 이름의 왜곡된 현상이 되어 미동 하나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제법 살아 보니 알 것 같다. 추억에 있어 편견이란 어느 작은 하나의 연상 작용에도 갑작스럽게 울컥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