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동이 어슴푸레 밝아 오는 아침, 축축한 소슬바람이 밤새 버석해진 마른 몸에 물기를 올린다.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새벽은 인생의 늦은 저녁처럼 쌀쌀하기만 하다. 지퍼를 목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어둠을 타고 내렸을 안개가 아직 채 물러나지 않았다.
새벽안개 낀 언덕 저기 위에서, 실루엣 가물거리는 한 사내가 뭉글뭉글 첫 빛이 번져가는 하늘을 배경음악 삼아 시 몇 줄을 나지막하게 노래하고 있다.
/헤르만 헷세
안갯속을 거니는 것은 이상도 하다
덤불과 돌은 저마다 고독하고
나무들은 서로를 볼 수 없으니
모든 것은 혼자일 뿐이다
내 인생 아직 밝던 그 시절,
세상에는 친구들이 가득하였지만
이제 짙은 안개 자욱이 드리우니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다
어둠은 어쩔 도리 없이
그리고 아주 슬며시
모든 것으로부터 모두를 떼어놓으니
그 어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는
진정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안갯속에서 거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삶이란 고독하고
누구도 다른 이를 알아보지 못하니
모든 것은 저마다 홀로일 뿐이다
삶이란 이런 것일 게다. 어느 하늘 아래에서 새벽을 맞을지, 어느 바닷가에서 첫 빛을 맞이 할지, 어느 하늘 한 곳에 눈길을 두게 될지,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쉴 만한 곳 하나쯤은 찾아지게 마련이고, 어디에서 인가는 멈춰 서야 할 곳을 가슴이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 삶인 것이다.
짧은 산책길에서 돌아와 서재의 창가에 앉는다. 새벽의 차향을 세재로 불러들인다. 신기루일까. 새벽하늘을 넘어온 한 여인의 움직임이 찻물의 수면을 스크린 삼아 가만가만 일렁인다. 저 여인의 계절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은 것이 좋다.
올 것만 같은데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이른 아침, 새벽안갯 속을 걸어 다니다가 헷세의 글을 뒤적거린다. 헷세와 그 여인이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선 잡초를 뽑으려는 겐지, 꽃밭을 다듬으려는 겐지, 새벽 밭일을 하려는 겐지, 몸을 숙인다. 근시와 원시가 뒤섞인 노안을 흐리게 하는 안개가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