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 간의 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사랑 또한 소통의 결과물이거나 적어도 소통이 사랑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동성애’ 이것이 흔히 베를렌과 랭보, 그들의 관계를 세속적인 시선이 바라보는 표현이다. 물론 이 두 남자의 관계에서 동성애라는 용어를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지만 동성애가 결코 그들 관계의 중심에 박혀있는 코어(core)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베를렌과 랭보의 관계의 정수리는 ‘천재성이 갖는 파괴적인 소통을 통한 문학적 영감의 생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을 소통이란 관점으로 본다면 정신적 소통에 육체적 소통이 더해져서 에로스적인 분위기로 채색된 하얀 그릇에 보기 좋게 담을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정신적인 소통 없이 맺는 육체적인 관계를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에로적인 사랑’이란 정신적이면서도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로스적인 사랑이 지닌 야릇한 성(性)적인 느낌은 시간이 흐름과 함께 정신과 육체 중에서 어느 것이 ‘주’이고 어느 것이 ‘부’인지를 혼동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산화시키는 강력한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다. 어느 날 돌아보면, 에로스적인 사랑이란 게 정신적인 소통이 있었기에 육체적인 소통을 이룬 것인지, 육체적인 소통의 강력한 최면에 마비된 것을 정신적인 소통이라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에로스적인 사랑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에로스적인 사랑이란 게 비단 젊은 남녀 간의 소통에만 있는 것일까. 무엇이 에로스적인 사랑의 본질인 것일까.
어쨌든, 일반화된 에로스적인 사랑에 관한 얘기는, 랭보와 베를렌의 소통을 다루려는 이 글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으므로 더 이상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다.
베를렌과 랭보,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문학적 소통으로 시작된 애정이 정신적 소통으로 이어졌고, 완전한 소통에 대한 갈증이 육체적 소통을 진정한 소통을 위한 ‘종교적 의식’처럼 받아들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랭보에 대한 베를렌의 집착이 그들의 관계를 파경에 이르게 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집착을 ‘눈먼 에로스적인 사랑이 가져온 이유 없는 구속’에서 기안한 것이라는 세속의 그릇에 담아내기엔 너무 큰 허전함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베를렌과 랭보의 관계를 동성애라는 표현으로 밖에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을 결코 틀렸다고는 할 수만은 없기에 칼로 환부를 도려내듯 동성애라는 표현을 그 둘의 관계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처럼 나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용어 속에서 글을 쓰고 있고, 그동안 쌓아온 지식이란 것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으니, 이 표현에 대한 다소의 긍정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지식이 자유를 준다고, 지식 안에서야 비로써 자유로울 수 있다고, 오래전부터 믿으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글에게 줄 수 있는 단어의 절벽 앞에 설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은, 특히 랭보와 베를렌 같은 천재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가없는 허공을 만나는 허무한 짓일 뿐이고 그곳에서는 오직 빈 망상만이 지친 날개를 힘겹게 저으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날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손을 크게 휘저어 겨우 건져낸 단어라는 것도 항상 공백의 잔상이 그 안에 남겨져있거나 어딘가에서는 공허한 메아리만이 들려올 뿐이라서, 무엇을 걸러내어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없기 일쑤이다. 그러니 축적되는 것, 남은 것이 별로 없는 지식은 늘 결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마련인 것이다.
“대체 그동안 쌓아온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삶이란 게, 답 없는 질문을 풀어가는 길이란 것을 알고는 있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은 늘 애를 태우게 만든다.
글을 쓰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빛조차 가린 어둠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있다. 젠장, 저게 뭐지, 낮게 내린 검은 구름 아래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창가에 작은 스탠드 하나 겨우 밝히고 있는 나보다도 검은 밤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저 작은 새 한 마리가 더 자유로우니, 저 놈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을 것 같다.
“대체 무엇이 밤을 가리지 않고 날 수 있는 저리도 큰 자유를 저 새에게 주었단 말인가.”
짙은 먹물 빛 비행에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밤은 시간의 흐름조차 검게 만드는 것 같다. 이왕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겨우 모아 붙잡아 두었던 지식에게 자유를 돌려주는 게 나을 것 같다. 닫아두었던 울타리를 열자 가슴에서 빠져나온 무언가가, 새의 궤적을 뒤따른다. 짙은 어둠의 밤하늘에 검은 선들이 죽죽 새겨진다. 남자와 남자, 서로가 서로의 연인이자 신앙이었던 베를렌과 랭보가 걸어간 길을, 그들의 소통을 검은 발자국을 남기며 쫓아간다.
(다음 글은 <베를렌과 랭보, 서로를 연인이자 신앙으로 갈구한 남자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