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많은 여행자에게 있어 길을 나선다는 건 어느 시골 마을의 장날마다, 할 일이라고 어느 것 하나 없는데도 장마당 나들이에 나서는 윗마을 김 서방의 하루나기 같기도 하다.
벽에 걸려있던 단벌 양복 집어 먼지 툭툭 털어
자그마한 마른 몸에 걸치고
늦가을 봉분 같이 듬성해진 머리카락에
기름 발라 쓰윽 빗어 넘기고
밑창 닳고 옆구리 헤어진 구두에
시꺼먼 구두약 쓱쓱 발라
입술 쪼아 하 하 깊은 숨을 뿜어
빙글빙글 천 돌려 반짝반짝 광 내고선
싸리문을 끼이익 밀쳐 연다
가는 길에 이곳저곳 기웃기웃
안부 인사 나누기 바쁘고
밭매던 아낙에게 괜한 눈길 주다가
실없는 농 한 마디 툭 던진다
장마당에 들어서자 이것저것
이 사람 저 사람 간섭질 하다가
배 시계 맞추어 기어든 국밥집을
저작거리 대폿집 삼아
멀건 국밥 한 그릇에
걸쭉한 막걸리 두 사발을
새끼손가락 집어넣고 휘휘 저어
끄윽 추임새 뻘겋게 넣어가며
뚝딱 호기롭게 해치운다
꼭 해야 할 무엇이 있어 찾은 것은 아니니
종종걸음 칠일일랑은 없고
어느 것 하나 바빠야 할 것 없고
아무런 눈치 살필 필요 없어
한 없이 느긋하기만 하다
김 서방의 장날 하루 행적이란 건
구름 없는 하늘에 불어 가는 바람 같고
언덕을 어른어른 넘어가는 아지랑이 같고
졸졸졸 흐르는 동네 입구의 개울물 같다
그럭저럭 잘 보낸 하루의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걸음은 별다른 이유 없이도 그냥 얼큰해지기 일쑤이다. 그것이 대폿집에서 넙죽 들이킨 막걸리의 걸쭉함 덕분이건, 왼손 아래에 축 늘어져 덜렁이는 자반고등어 한 손의 쿰쿰한 포만감 때문이든 간에, 집을 찾아가는 익숙한 길에선 취기 오른 노래 한 자락을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이 길의 어딘가에 있을 들판을 지나다가, 서쪽 하늘에 기웃하게 걸린 구름 뭉텅이를 오월의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석양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붉어진 얼굴에서 황금빛 미소가 피어날 것 같다.
퇴근길에 집으로 돌아가는 도시 사내의 걸음이 저기 윗마을 김 서방의 걸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저 하루의 나들이 같은 출근길을 나섰다가 터벅터벅, 제 집을 잊지 않고 찾아가는 길이 도시 사내의 귀갓길이니 혹여 가로등 불 내린 동네 어귀 빵집에서 허연 비닐봉지를 손에 쥐어 잡는 날이면, 잠을 참으며 아비를 기다린 아이의 낭랑한 웃음소리를 기대해 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