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뜩 끄집어낸 낡은 LP판에서 해 묵어 곰팡내 날 것 같은 색 바랜 흑백의 기억을 뒤적거리든 날, 도시의 번잡함을 무작정 벗어버린다. 빳빳이 다려 입은 슈트에 가려진 축 늘어진 몸은 인지하지 못한 사이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을 달리는 완행 버스의 뒷자리에 앉는다.
따다닥, 타닥, 탁탁, 투 루룩
헐겁게 박혀 지난 이의 손 때 자욱하게 박여 있는 유리창의 떨림음에 익숙해져 갈 즈음, 멀리 까마득하다가 금세 눈앞으로 다가와서 바로 옆구리를 횅하니 스쳐 지나가 버리는, 길 가에 늘어선 둥치 굵은 플라타너스의 아스라한 최면에 정신의 고삐가 살짝 풀어진다.
눈을 뜬 채 깜빡 든 선잠에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의 한 자락에서 버스 천장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의 기척이 바닥을 기어오르려는 애처로운 진동을 공명 시킨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뜬 눈에 내려져 있던 최면의 장막이 걷히고 검누런 콩고물 같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있던 가로수가 바람의 무늬를 따라 내리는 하늘 물기에 씻겨 젊음을 되찾는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인생의 버스가 비포장 시골길을 덜커덩거리며 달려가고 있는 완행 버스인 것일까.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 않았으니 언제 내려야 할지 몰라도 좋겠다.
내리지 못한 정류장을 몇 군데 지나오는 사이 차창 너머 산자락엔 해가 기울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