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키호테에게 - 돈키호테의 독백
1.
삶이란 건 말이야
바람 불고 흐린 날에도
이정표 없는 거친 길을
어떻게든 걸어가야만 하는
이유 없는 걷기와 같은 거야
가야 할 곳 따위는 애초부터 몰랐으니
갈림길마다에서 망설이게 되어있다는
원초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그 길 걷기인 게야
하긴 존재하지도 않았을지 모르는 길을,
그게 길인 지조차 모르는 길을,
대체 어떻게 찾아내겠다는 건지
그 길을 찾으려는 사람을 볼 때면
난 무척 이상하다는 생각하게 돼
그런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어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는
그게 지금 너와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니깐
2.
지칠 것만 같은 그 여정에서도
그나마 몇 가지 만용은 허락하는
어수룩한 장난꾸러기 같은 놈을
사람들은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어
아마 인생이란 그놈은
지금 자기가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야
길을 가다 보면 허상에 취한 날이나
그렇지 않은 날에도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그 무엇인가는 있기 마련이야
그 위안이란 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인 게고
그 무엇인가를 찾아가고 있는 나를
사람들은 돈키호테라고 부르고 있어
3.
멋진 갑옷을 입은 탱탱한 몸을
위풍도 당당한 명마에 싣고
탑 속에 갇혀 있을 공주님을 구하러
마을의 한가운데로 난 넓은 길을
눈부시게 달려가고 싶지만
앙상하고 푸석한 몰골이 부끄러워
삐걱거리는 갑옷 속으로 숨어들곤 해
하지만 성문 앞 우물에 비친 나는
갑옷을 입고 은빛 창을 높이 치켜든
아직 젊고 멋있는 기사야
사실 내가 가진 갑옷과 창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낡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
자세하게 살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내 몸뚱이보다 더한 세월의 긁힘이
골 깊게 새겨져 있을 거야
모른 척한다는 것이
외면을 한다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바람이 먼지를 적당히 일으키고
미간이 찡그러질만큼 눈부신 날을 골라
사람의 마을을 지나가려고 해
강하게 산란된 밝은 빛이
제대로 눈을 뜰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를 멋지게 보이게 할 거야
난 그런 그들의 시선이면 충분이 행복할 수 있어
아무튼 오늘도 난,
공주님이 갇힌 탑을 찾으러 갈 거야
4.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곳에 공주님이 갇혀 있든 아니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탑에 갇힌 공주님은
반드시 내가 구해야만 한다는 거야
그런데 구해서는 어쩔 거냐고
공주님과 기사가 등장하는 동화에서처럼
키스로 청혼을 할 거냐고
혹시 공주님이 큰 병에 걸렸거나
오랜 감금 생활로 상태가 안 좋거나
성격 까칠하거나
무지 못생겼으면 어쩔 거냐고
어, 그 참 어쩌지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못생긴 공주님 얘기나
중병 걸려 상태 안 좋은 공주님 얘기 같은 것은
책에서 읽은 적이 없고
누군가에게서 들어 본 적도 없거든
생각해봐, 그렇다면 어느 기사가
제 목숨 걸고 공주님을 구하러 갔겠어
나 보다 앞서 공주님을 찾으러 간
정신 멀쩡한 기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삶을 걸어도 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어
암튼 난 공주님 앞에서도
이 멋있는 갑옷을 벗을 생각이 없어
그 이유는 알아서 생각해
그냥 아름다운 공주님을 구하러 길을 나선
멋진 기사님의 이야기까지가
내가 받아 든 시놉시스 같은 대본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