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 식어 버린 에스프레소 잔의 표면에서 누군가의 지나간 체온이 느껴진다. 보도를 향해 두어 걸음 튀어나온 길 건너 노천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남남 커플의 진한 희롱이, 의도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이방인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다.
괜한 호기심에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보다. 하긴 그냥 흘려보낸다 해도 어색할 것 하나 없는 어정쩡한 시간 속에 재촉당할 일 없이 혼자 앉아 있었으니, 얼마나 지났느냐 따위는 전혀 중요할 일 아니겠다.
사랑에 빠진 앳된 저들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랭보가 오버랩된다. 가장 악마적이고 가장 상징적인 것이 사랑이고 그중에서도 동성애이기 때문일까. 이성을 마비시키고서야 빠져들게 되는 사랑의 속성이란 게, 그것이 이성 간이건 동성 간이건, 없는 것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가진 듯 착각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빈손으로 뒤돌아서게 만드는, 잔인함에 있는 것일까.
등 뒤의 테이블에서 또 다른 뿌연 연기 줄기가 아침 호수의 안개 자락처럼 번져온다. 바람에 날려 온 니코틴 냄새가 식은 커피 향이 스쳐간 빈자리를 메운다. 담배를 끊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향과 맛은 아직 기억하고 있나 보다. 어떤 하나가 빈자리에는 다른 어떤 하나가 슬며시 차오르게 되는 것 같다.
하얀 종이에 둘둘 말려 제 살을 벌겋게 태운 담뱃잎의 검갈색 찌꺼기가, 보도에 떨어진 채 말라 버린 나뭇잎의 흔적 같다. 태양이 머리 위에 높이 뜬 파리에서, 노천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식은 커피 잔으로 가슴을 데우는 여행자의 눈길에서 아무 걱정 없다는 듯 한가로이 낮 풀을 뜯고 있는 세렝게티 초원의 초식동물 같은 느릿한 몽롱함이 느껴진다.
그를 이해하려는 사람의 가슴에는, 열이면 열 모두가 그들 각각의 그를 품고 있다. 젊은 날에, 젊음이 가시기 전에, 젊음을 영원히 간직한 랭보를 만나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입 밖으로 나온 그 계획을 전해 들은 몇몇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그 시절에는, 그럴 만도 했다.
“야 야 아프리카라니, 대체 정신이 있는 거니?”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갔던 그곳도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이곳도, 파리처럼, 아프리카의 들판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란 것을. 해야 할 것을 잃어버린 발걸음은 제자리에서 서성일뿐이다.
파리의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다. 용기를 내어봐야겠다. 의자를 끌어 랭보의 테이블에 붙인다.
“어느 길이 갈만한 길인지, 이제는 말해 줄 수 있겠니?”
현실의 계절에서
사랑의 절대적 신앙에 베인 이,
상실의 아픔을
절벽 끝에서 울부짖던 이,
이곳을 찾는다
문은 그에게만 열린다
이곳은 그의 망명처이다
이곳에서 그는
일체의 도덕에서 면죄된다
바다는 스스로 노래할 것이고
태양은 스스로 붉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의 은신은 깊다
사랑과 상실의 망령은
이곳에서도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결코 이곳을 떠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