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카라바조에게도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여러 사건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카라바조의 행적을 따라 그것들을 구분해 보면 어린 시절 흑사병을 피해 이주해 간 카라바조에서 겪었던 것과, 밀라노의 화실에서 그림을 익히던 십 대 시절의 것, 그리고 밀라노를 떠나 도착한 로마에서의 것이 있다.
카라바조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어린 시절에 그의 가족들과 관련되어 겪은 일들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망했고, 몇 년 뒤에는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남으로써 어린 카라바조는 '죽음'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또한 십 대 시절, 도제라는 신분으로 4년 여를 화가로서의 역량을 쌓은 밀라노의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에서 사춘기 십 대로써 겪었을 생활과 경험은 카라바조의 작품과 삶 그리고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후 로마로 삶의 기반을 옮긴 후에, 궁핍한 무명의 화가로 지내던 카라바조에게 처음으로 후원(비록 제대로 된 후원은 아니었지만)의 손길을 내밀었던 [사제 판돌포 푸치]와, 어려운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카라바조와 함께 예술가로서 성공을 꿈꾸었던 연하의 친구 [마리오 민니티]와, 생활을 위해 거쳐간 로마의 여러 화실과 그곳에서 어울렸을 여러 보조 또는 수습 화가들이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사람과 환경이 어떤 형태로든 간에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사상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카라바조가 거장으로써 로마의 화단에 명성을 날릴 수 있게 만들어 준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당시 로마의 교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예술 애호가로서 누구보다 수준 높은 안목과 소양을 갖추었던 인물인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Francesco Maria del Monte, 1549 – 1627)을 만나 그의 견고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얻게 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초상화>(Portrait of Cardinal Francesco Maria del Monte by Ottavio Leoni)
카라바조의 '영혼의 후원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초상화는 [오타비오 레오니](Ottavio Leoni, 1578–1630)의 작품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로마가 주된 활동 무대였던 [오타비오 레오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카라바조의 초상화>(A drawing of Caravaggio, c. 1621)를 그린 초기 [바로크](early-Baroque) 화가이자 판화가(engraver 또는 printmaker)이다. 카라바조를 얘기하게 되면 무엇보다 우선해서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오타비오 레오니]의 <카라바조의 초상화>이기에, 카라바조에게 모종의 애정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오타비오 레오니]의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카라바조와 [오타비오 레오니]를 연결하고 있는 숫자를 살펴봐야 한다.
먼저 카라바조가 태어난 년도가 1571년이고 [오타비오 레오니]가 태어난 년도는 1578년이니, 카라바조가 [오타비오 레오니]보다는 일곱 살 연상이다. 또한 카라바조가 사망한 것이 1610년 7월 18일의 일이고 [오타비오 레오니]가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1621년의 일이니, 카라바조가 사망한 것과 [오타비오 레오니]가 그린 <카라바조의 초상화> 사이에는 11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카라바조가 사망할 당시 [오타비오 레오니]의 나이는 32세였고 카라바조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로마를 떠난 것은 [오타비오 레오니]가 28세였던 1606년이다.
이런 질문을 가져볼 수 있다.
"카라바조가 죽고 나서 11년 후에나 그려진 <카라바조의 초상화>는, 어떤 카라바조를 기준으로 그려진 것일까?"
34세의 카라바조가 로마를 떠난 것이 [오타비오 레오니]가 28세였던 1606년이고, 이후 카라바조는 로마로 돌아오지 못한 채 1610년 타지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1621년에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은 [오타비오 레오니]가 1606년 또는 그 이전에 카라바조를 만났었고 카라바조가 사망하고 11년 후에 그때의 기억을 토대로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그렸거나, 카라바조가 사망하기 전에 [오타비오 레오니] 자신에 의해서 또는 누군가 남겨둔 카라바조의 얼굴 그림(또는 스케치)을 보고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그렸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오타비오 레오니]가 바로크 예술가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크를 개척한 것이 카라바조였기에, [오타비오 레오니]는 카라바조에게서 큰 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그 또한 지금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카라바조에게 애정을 가졌을 것이다. 결국 <카라바조의 초상화>는 카라바조에게 애정을 갖고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이의 손으로 그린 것이기에, 카라바조의 예술이 그런 것처럼 가장 사실적이고 진실한 카라바조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초상화> (A drawing of Caravaggio by Ottavio Leoni), c. 1621
사제 [판돌포 푸치]와 결별한 후 로마의 여러 공방들을 전전하며 거처와 끼니를 해결하던 무명의 젊은 화가 카라바조는 미술상인 [코스탄티노 스파타](Costantino Spata)를 만나 그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코스탄티노 스파타]와의 만남은 카라바조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코스탄티노 스파타]를 통해 카라바조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로써, 카라바조에게 불꽃같은 명성을 안겨 주었고, 카라바조의 일생 동안 그 불꽃이 시들지 않게 보살펴준 [프란체스코 델 몬테](Francesco del Monte) 추기경을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속임수와 신화, 음악의 가벼운 장면들을 그린 젊고 보헤미안적인 초기의 작품들 중에는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과 그의 사적인 사교 모임을 위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카라바조의 작품 리스트를 살펴보면 이런 류의 작품들은 1600년 이전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기의 작품들에 대해 "카라바조 답지 못하다."라든지 "카라바조의 전성기의 작품들과는 기법이나 양식이 많이 다르다."는 식의 평가와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에 대해 [카라바조 연구소]의 [월터 프리들렌더](Walter Friedlaender)는 1955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카라바조 연구> (Walter Friedlaender, Caravaggio Studies, 1955, p. ix.)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꽃과 과일, 가벼운 소년들의 모습과 젊고 보헤미안적인 음악적인 장면들은 매우 매력적이고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들의 한 편에서는 카라바조만의 어떤 상실감을 찾아볼 수 있다. 카라바조가 이러한 그림을 그린 몇 년 후에는 그의 관심 거의 대부분을, 그림을 마주하는 이라면 즉시 알아차릴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기적을 가져오게 하는 종교적인 헌신의 기념비적인 것을 창조하는 것과 같이, 실현 불가능한 것을 실현시키려는 것에 완전하게 빠져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월터 프리들렌더]의 이 표현은 분명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통해 찾아낸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카라바조에 대한 그의 찬양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쨌든 그의 말처럼 카라바조가 그린 이 시기의 작품들과 그 이후의 작품들을 면밀히 비교해 보면, 이 시기의 작품들 전반에서 느껴지는 '카라바조답지 못한 가벼움' 속에서도 '카라바조만의 상실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작품들이 이후 예술적인 촉매제로 작용하여 카라바조에게 진정한 재능과 명예를 가져다준 것이란 점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