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카라바조의 살인사건에 대한 고찰

24. 카라바조의 살인사건에 대한 고찰


카라바조가 [라누치오 토마소니](Ranuccio Tommasoni)를 살해한 사건이 있기 전까지 후원자들은, 그가 저지른 각종 분쟁과 싸움질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수 있었다. 카라바조의 성화가 그들의 예술적 목마름을 해소시켜주는 한 그들은, 카라바조의 무분별한 기행을 ‘천재 예술가의 일탈’ 정도로만 여겼던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누군가 카라바조를 잡아주었더라면' 또는 '카라바조의 내면을 좀 더 세심하게 보살펴 주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게 된다.


그 원인이나 세부 내용이 어찌 되었건 카라바조가 [토마소니]를 살해한 것은 '살인사건'으로 분류되었다. 게다가 [토마소니 일가]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부유하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적인 힘과 사회적인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가졌거나, 그런 인사들과 연줄이 닿아있다는 얘기이다. 토마소니의 가문은 [토마소니]의 죽음에 격분했고 카라바조를 살인범으로 고소하였다.


결투로 인한 것이었건 다른 어떤 행위로 인한 것이었건, 살인사건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범죄이다. 카라바조가 살인을 저지른 이상, 카라바조의 후원자들은 그들의 막강한 힘에도 불구하고 당장에는 카라바조를 보호할 수 없었다. 살인은 그만큼 심각한 범죄이고 그 대가는 아주 혹독했다. 카라바조에게는 참수형이 선고되었고 법적인 형의 집행을 위해 공개적인 포상금이 그의 목에 걸렸다.


카라바조에게 내려진 '참수형 선고'를 통해 그날의 사건이, 전해지고 있는 바처럼, '결투'로 인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가져볼 수 있다. 만약 그날의 살인사건이 '결투'로 인한 것이었다면, '결투'란 게 두 사람 간의 합의 하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인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이며, 그 결과로 누군가는 죽게 될 수 있음을 카라바조와 [토마소니]는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어째서 카라바조에게는 '참수형'이라는 법정 최고의 형벌이 선고된 것일까."

"카라바조에게 내려진 '참수형' 선고는 과연 타당한 것이었을까."


카라바조에게 법정 최고형이 선고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보면, 그날의 사건이 '결투'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간에 평소 쌓여 있던 좋지 않은 감정이 빚어낸 우발적인 살인이었지만 [토마소니 가문]을 비호하는 세력의 압력과 평소 카라바조의 악행으로 인한 법정기록이 판결에 영향을 미쳐 결국 가중된 선고가 내려졌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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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삶에 대한 기록에는 예술가로서의 호평만큼이나 범죄자로서의 악평이 채워져 있다. <<The Lives of Caravaggio>>(카라바조의 생애, 1991, Scala Books)를 쓴 [조르조 본산티](Giorgio Bonsanti)에 의하면 카라바조의 고객 중에 1609년 8월 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작품(지금은 분실되었다.)을 주문하기도 했던 [니콜로 디 자코모](Nicolo di Giacomo)는 카라바조를 ‘매우 혼란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였고, 예술사학자(Art Historian)인 [프란체스코 수신노](Francesco Susinno, 1670-1739)가 18세기 초에 쓴 <<메시나 화가들의 생애>>(Le vite de' pittori Messinesi (Lives of the Painters of Messina))에서는 카라바조를 ‘무분별하고 정신 나간’ 그리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미친 사람’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런 모든 사건 속에서도 카라바조는,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날의 살인이 남자들 간의 정당한 결투로 인한 것이었기에, 카라바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만 했던 ‘정당방위’라고 여긴 것 같다.


카라바조에게 내려진 참수형의 선고는 그의 심리적인 불안전성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결과 '잘린 머리'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였고 자신의 잘린 머리를 자신의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속에 그려 넣었다.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은 2개의 작품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1607년 작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90.5 cm × 116.5 cm, c.1607,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1610년 작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25 cm × 101 cm, c.1610, Galleria Borghese, Rome)이다.


David_with_the_Head_of_Goliath_-_Vienna(1607).jpg

비엔나에 있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90.5 cm × 116.5 cm, c. 1607,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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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 5월 29일에 발생한 살인사건을, 세심하게 살펴본 ‘카라바조 마니아’라면 '살인사건'과 '이와 관련된 각종 기록'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다. 카라바조를 두고, 카라바조가 [토마소니]라는 사내를 살해한 행위를 두고, 이렇게 저렇게 평가를 내린 기존의 기록들을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기록한 이들은 카라바조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였으며, 카라바조가 저지른 사건을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었던 것일까. 단지 그들이 쓰고 싶은 것만을 기록이란 이름으로 남긴 것을 아닐까.


카라바조가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카라바조는 자신의 죄에 대해 무지한 것인지,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상황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 것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죄인이 되지 않을 거야."


카라바조로 하여금 죄에 이르는 기행을 저지르게 만든 것은, 카라바조의 내면에 있는 [자아]와 [초자아]가 아니라, 그의 본능을 따르게 만드는 [이드](id)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로마의 뒷골목은 카라바조에게 [자아]와 [초자아]보다는 [이드]의 지배력이 강해지는 장소이며, 그 [이드]가 카라바조를 기행과 폭력으로 이어지도록 만든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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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참수형의 판결이 내려진 이상 카라바조는 형의 집행을 피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물론 이 도주에는 그의 후원자들의 적극적인 주선과 도움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남쪽에 위치한 나폴리로, 나폴리에서 몰타로, 몰타에서 시칠리아로, 시칠리아에서 다시 나폴리로 도망 다니는 범죄자의 삶을 살면서, 사면을 애원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떤 죄의 대가는 사망이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행적을 쫓다가 보면 때론 나 자신조차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과연 카라바조의 죄는 무엇일까. 온갖 잡다한 분쟁과 거친 폭력인 걸까. 아니면 살인인 것일까. 그날의 살인이 결투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면 세상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이들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카라바조일 것 같은 카라바조'를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발짝 앞으로 나간 생각의 걸음이 질문의 계곡으로 접어든다.

“누군들 카라바조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카라바조를 알려는 것이 단지 자기 위안이라는 엉성한 돌탑을 쌓으려는 것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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