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의 순교>(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323 cm × 343 cm,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델 몬테 추기경의 전폭적인 후원을 배경으로 로마의 화단과 부유한 귀족들, 고위 성직자들에게서 예술가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카라바조에게, 그를 일약 거장으로 떠오르게 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로마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성당인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San Luigi dei Francesi)으로부터 콘타렐리 채플을 장식할 대형 제단화인 <성 마태의 순교>(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와 <성 마태의 소명>(The Calling of Saint Matthew), <성 마태의 영감>(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의 제작을 의뢰받은 것이다. 이 세 작품이 카라바조의 삶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재위하고 있던 1600년에 가톨릭 교회는 12번째의 희년(禧年, Jubilee)을 맞게 된다. '성스러운 해'(성년(聖年)) 또는 '복된 해'라고도 하는 희년은 구약에 나오는 출애굽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희년은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랬듯이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회복시켜주는 성스러운 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믿음이 있는 자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과,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회복'이 희년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희년이 되면 로마의 거리는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들로 넘쳐나게 된다. 로마 교황청은 희년을 기념하여 ‘죄로부터 큰 사면(대사(大赦))’을 베풀고, 또한 큰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경건함을 되찾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1300년 [교황 파시오 8세] 때부터 시작된 이러한 희년 행사는 원래는 100년을 주기로 열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후 교회의 상황과 여론에 따라 행사의 주기를 50년으로 조정하였다가 다시 33년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에 있었던 다섯 번째 희년부터는 25년을 주기로 열리게 되었고, 1470년에 [교황 바오로 2세]는 칙서를 통해 25년을 주기로 희년을 여는 것으로 공식화하였다. 영어의 단어에서 25년째 또는 50년째 기념제(일)를 일컫는 단어인 [Jubilee]가 이 희년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활동하기 바로 전에 있었던 희년은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재위할 시기인 1575년에 있었던 11번째의 희년인데, 기록에 따르면 이때에 유럽 각지에서 약 30만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로 몰려들었었다고 한다. 당시의 유럽 인구와 이동 수단을 생각해보면 실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성스러운 희년을 맞이하여 ‘죄를 사하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로마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의 역사학자인 [Jan De Vries](Professor, Economic Historian, UC Berkeley)의 연구에 의하면 1500년에 유럽의 인구(러시아와 오트만 제국 제외)는 약 6,160만 명이었고 1550년에 약 7,020만 명, 1600년에 약 7,8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수치를 기준으로 보면 1575년에는 약 7,400만에서 7,500만 명의 사람들이 유럽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현재 유럽의 인구는 약 7억 5천만 명에 이른다. 따라서 11번째 희년이 있었던 1575년 유럽의 인구는 현재의 약 10분의 1인 셈이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1575년의 30만 명이란 순례객의 숫자는 현재의 300만 명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라고 할 수 있고, 거기에 당시의 교통 여건과 여행을 위해 수반되어야 했을 여러 여건들까지 고려한다면 그 시대에는 희년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1599년이 되었다. 희년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유럽 각처의 교회들은 바로 다음 해인 1600년에 맞이하게 될 12번째 희년을 준비하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특히 로마의 교황청과 교회들은 더욱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 희년을 놓치게 되면 다시 25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연로할 대로 연로한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은 이 희년이 자신들의 삶에 있어 마지막 희년이란 것을 알고 있기에, 최선을 다해서,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붓고 영혼까지 받쳐서라도, 최고의 것들로 행사를 준비하려 하였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은 콘타렐리 채플을 장식할 제단화인 <성 마태의 순교>와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영감>를 카라바조에게 주문하게 된다. 비록 카라바조가 이 작품을 의뢰받게 된 것이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가 의뢰받은 다른 작품들의 제작에 바빴기 때문이긴 하였지만, 카라바조는 콘타렐리 채플의 이 세 작품들을 자신 만의 기법으로 완성함으로써 그가, 주세페 체사리를 넘어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것을 인정받게 되었다.
* 이 세 작품에 대해서는 <카라바조 예술의 이해와 작품 분석>에서 별도록 자세하게 다룬다.
<성 마태의 소명>(The Calling of Saint Matthew), 322 cm × 340 cm,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성 마태의 영감>(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 292 cm × 186 cm, 1602,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