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이 지척인 센강의 건너편에서 그저 몇 사람 걸음 편하게 건널 수 있을만한 키 낮은 다리를 발견한다. 퐁 네프나 미라보 다리 같이 너무 선명하기만 한 이름을 붙인다면 왠지 서먹해질 것만 같은 이 폭 좁은 구조물은 센강이라는 물의 길 위에 걸쳐놓은 건널목처럼 느껴진다.
분명 어제와 그 전날에도 이 강변길을 걸어 다녔지만 지금에 와서야 인지하게 된 이 다리는 누군가 파리의 하늘에 슬쩍 뿌려놓은 양떼구름 같기도 해서 어딘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왜 이제야 알아차리게 된 것일까. 강물인지 바람인지 또는 지나가던 사람인지가, 건너편 강변길에게 물어보라 고, 살짝 귀띔한다. 그 참, 다리의 이 편과 저 편이란 것이 단지 글자 하나의 차이일 뿐인데 그 사이에는 강폭보다 더 넓은 무언가가 끼어있나 보다. 분명 같아 보이는 것인데도 바라보는 눈빛이나 걸어가는 방향에 따라서는 너무 다른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나무와 쇳덩이를 엮어 만든 이 다리 위에 서면 센강의 그 어디에서보다 더 선명한 에펠탑의 형상을 추억에 담아 넣을 수 있다. 가슴이 설렌다.
"에펠탑을 가림 하나 없이 온전히 품을 수 있다니, 그것도 센강의 강물을 발밑에 가까이 두고서."
여행길에서는 이런 갑작스러운 인연조차 필연이라고 믿게 된다. 편안한 떨림이 개울가에 발 담근 어린 시절의 맑은 날 오후처럼 고단함을 씻어 내린다. 파리의 햇살을 한가득 품어 반짝이는 강물에 부풀어 오른 낭만 몇 방울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린다. [드 빌리 인도교](Debilly Footbridge)라는 익숙하지 않았던 이름 하나가 물결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에펠탑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광장에서 노천카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초코시럽과 바나나 조각으로 속을 채운 프라페를 에스프레소 커피와 함께 주문한다.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 커피보다는 부드럽지만 미국식 아메리카노 커피보다는 진한 것이 파리에서 받아 들게 되는 에스프레소 커피이다.
좁은 이동식 가게 안에서 이런저런 주문을 챙기고 있는 파리지엔느의 무뚝뚝함이 겨울날 찾아간 자갈치시장 아지매의 그것보다 더 냉랭하다.
오늘따라 온기가 더 그리워지는 것은 쌀쌀해진 날씨 때문일 게다. 조금 큰 컵에 뜨거운 물을 반쯤 채워서 달라는 부탁을 조심스럽게 넣어본다. 파리의 노천카페에선 미국식 커피를 찾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반응의 속도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다. 입술을 살피던 눈꺼풀이 채 깜빡이기도 전에 ‘No'라는 짧은 한마디가 들려온다.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은 그녀의 응답이 불친절하다기 보단 파리지엔느의 완고함처럼 느껴진다.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여행길에서의 체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해야 할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것들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엔 아무런 신경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 파리를 살아가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인 게야.”
프라페의 달콤함 때문인지 에스프레소 커피의 진한 향 때문인지 살짝 어지럼증이 일어난다.
“지금이 쉬어가야 할 때이고 이곳이 쉬어가야 할 곳이야.”
가까운 나무벤치에 걸터앉는다. 잘 생긴 파리의 비둘기 몇 마리가 다가와서 자꾸 조른다. 틀림없이 수컷이라고 단정한다.
"그 녀석 넉살 한 번 좋은 것이 연애질 꽤나 하겠어."
파리의 하늘과 센 강의 바람과 에펠탑과 비둘기와 함께 파리의 시간을 나눈다.
지금 여기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 자체가 파리의 낭만이고 자유이다. 가슴의 창을 파리를 향해 열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파리의 일상을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때론 감상의 물감을 듬뿍 찍어 기록한 그의 파리는 그야말로 축제처럼 다채롭다.
원제목인 <A Moveable Feast>의 의미를 파리에 와서야 비로써 이해하게 된다. 늘 ‘움직이는 축제’, ‘멈추지 않는 축제’가 여기저기에서 이유 없이 열리고 있는 낭만의 광장이 이곳 파리인 것이다.
어니스트의 말을 빌린다.
"하루하루가 축제일 수 있다는 것은 내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도 여기에 걸터앉아 저 에펠탑을 바라보면서 프라페를 곁들인 프랑스식 에스프레소 커피를 홀짝거렸을 것이다. 어니스트의 파리는 어느 사이 나의 파리가 되어 있다.
어느새 마지막 역에 이르자
시간의 이성 앞에 선
계절이 몸을 떨고 있다
닫아 두었던 창을 열고 서는
입 둥근 백색의 종이컵에
에스프레소 커피를 낮게 채운다
커피의 깊은 내면이
짙은 갈색의 옹달샘에 오롯이 고이자
누군가의 삶의 향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어느 계절의 끝자락에 서서
지난 것들을, 가슴으로 배웅한다
이제 다시 센강을 돌아 내려가야 한다. 사실 센강의 흐름을 제대로 모르니 이 길이 내려가는 길인지 올라가는 길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반환점이고 지금이 돌아야 할 때란 것뿐이다. 지나온 길인데도 새롭게만 보이는 것은 이곳이 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센강의 물살을 따라 낭만과 사색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파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성의 울타리는 허물어지고 감성의 안뜰에는 축축한 안개비가 내리기 일쑤이다.
이성의 이해에 기대려는
아무런 짓도 필요 없이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파리의 거리에서
물랭루주의 풍차 바람을 따라
골목길 언덕을 오르다가
장밋빛 물감 듬뿍 찍어 바른
몽마르트르 카페의 어닝 아래에 앉아
짙은 사랑에 빠진다
파리의 사랑은
물랭루주의 붉은 공연처럼 유혹적이고
테르테르 그림쟁이의 붓질처럼 자유롭다
늘어진 저녁의 해가
코발트 파랑 하늘 캔버스에
쓱쓱 덧칠을 이겨 넣을 때면
투명한 유리 글라스에는
파리의 사랑으로 디캔딩 한
센강의 노을빛 포도주가
잔 가득 차오른다
파리의 길 바람을 따르는
센강의 물결은
왜 그랬는지 이유 따윈 묻지 않는다
샹젤리제를 따라나선 파리의 사랑은
철 지난 샹송처럼 점점 지독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