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파리의 가을 일기

12. 파리의 가을 일기



돌이켜보면 가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리곤 하지만 어떤 해에는 지나치다 할 만큼 오랫동안 곁을 서성거려서 성가시지만 아름다운, 그래서 아프고도 아련한 계절인 것 같다. 살아보면 알게 된다. 너무 빨리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 오래 머무는 것보다는 좋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래야 애틋해진다는 것을.


기분 좋게 이어지고 있던 가을의 날씨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갑작스럽게 차가워진다.

"괜찮아. 끝무렵이란 원래 이런 거야."

11월의 날씨는 서울에서나 뉴욕에서나 하루 뒤를 가늠하기 어려우리만큼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떠날 때는 주변조차 어수선해지기 마련이라 ‘드는 자리보다는 나는 자리가 더욱 눈에 띄는 법’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겨울나기 채비에 나선 뉴욕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 파리의 꿈을 꾼다.

“파리는 지금 이러이러할 거야.”

추억을 휘적거리다 보니 파리의 소식이 더욱 궁금해진다.

“가을이 지나가버리기 전에 파리에 가야겠다.”

조급해진 마음에 파리행 밤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심하게 요동치던 비행기가 검뿌연 밤의 구름 위로 날아오른다. 대서양을 덮은 검은 하늘을 눈 껌뻑이며 바라보다가 자리를 길게 눕혀 잠을 청한다.


꿈을 꾼다. 달빛과 별빛이 반짝이는 대서양의 짙은 구름 위를 비행하고 있는 갈매기의 꿈을 꾸다가, 프로펠러의 회전음이 작은 벌새의 날갯짓 소리같이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 비행기 한 대를 본 것 같다.

“아, 생텍쥐페리, 그 이구나.”


대서양의 밤하늘을 날고 있는 생텍쥐페리의 은빛 비행기가 별빛과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검회색의 밤하늘을 사막 삼아 내려앉은 비행기 옆에서 어느 먼 별에서 온 것 같이 특이한 복장을 입은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그를 본 것 같기도 같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바다의 신기루처럼, 하늘에도 신기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파리를 찾아가는 오늘 알게 된다.


*** ***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몸을 이끌고 파리 인근의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린다. 7시간이라는 길지 않은 비행시간과 5시간의 시차가 밤을 아침으로, 뉴욕을 파리로, 영어를 불어로 일순 바꾸어 놓았다.


안내문을 살펴가며 파리 도심으로 향하는 전철에 올라탄다. 샤를 드골 공항은 파리가 그런 것처럼, 올 때마다 새롭게만 느껴지는 파리의 관문이다.


밀폐된 공간을 겨우 벗어났는데 또 다른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켜야 한다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다른 방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철거덕 철거덕 철길의 주기적인 진동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한 시간 여를 버텨내다가 숙소가 가깝다는 역에 내린다. 가방을 끌고 십분 남짓 걸어가자 숙소의 이름이 적힌 사인보드가 보인다. 서둘러 잡은 곳이지만 위치며 분위기며 무엇 하나 나무랄 것이 없어 보인다.


시간을 확인한다. 체크인 시간보다 3시간이나 빠른 아침 10시경이다. 접수 데스크에 짐을 맡겨두고 체크인 시간까지는 주변을 돌아다닐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객실의 키를 건네받는다. 가을이 깊어지긴 했지만 가을의 끝무렵이라고도 그렇다고 겨울의 초입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이 계절의 파리는 비수기인가 보다.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개 층을 올라 객실에 도착한다. 짐을 풀다 말고 거리를 향해 난 하얀 갤러리 창을 활짝 연다. 룸서비스로 뜨거운 물을 시켜 티백 하나를 담근다. 장미잎과 찻잎이 어우러진 향 좋은 차의 온기가 몸을 따뜻하게 데운다. 나른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깜빡 떨어진 잠도 파리의 흥분을 가라앉히지는 못한다. 와인색 등 가방을 가볍게 챙겨 문밖으로 나선다. 겨울이라고 하기엔 아직 조금 부족한 가을의 끝 무렵, 조금 쌀쌀한 바람을 기분 좋게 맞으며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 익숙한 곳이지만 늘 느껴지는 새로움에 가슴이 벅차 온다.


숙소에서 가까운 루브르 박물관 외곽을 돌아 마들렌성당과 오페라, 프렝땅 백화점 인근을 걸어 다니다 보니 저기 멀리 에펠탑 뒤편에 붉은 노을이 걸려 있다. ‘아’ 하는 사이, 밤의 어둠이 파리의 거리에 내려선다.


가로등 켜진 넓은 콩코드 광장의 밤 불빛을 쫓아 샹젤리제에 들어선다. 낮의 길이가 짧아진 이 무렵의 샹젤리제는 어여쁘지만 쌀쌀맞은 파리지엔느 같다.


총총한 별빛 같은 에뜨와르 광장에 도착한 걸음이 무겁다. 생각해보니 첫날부터 욕심을 부린 것 같다. 대서양을 건너온 피로가 갑작스레 몰려온다. 숙소로 걸음을 돌려야겠다. 떠나온 뉴욕의 밤거리가 벌써 가물가물해진다. 살아온 날이 길어갈수록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은 짧아지는 것 같다.


검은 옷의 작은 참새, 에디뜨 피아프가 노래하는 파리를 들으면서 파리의 밤거리를 가슴에 담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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