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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의 미로와 날개에 대해

시인 이상의 미로와 날개에 대한 고찰    

                    

1. 시인 이상의 날개         

꿈을 찾으려는 것보다 꿈을 꾸려는 것 자체가 더 힘에 겨웠을 일천 구백삼십 년대의 경성이란 도시에서, 이미 너무 깊숙이 빠져버린 이상理想의 늪 웅덩이를 허우적거려야만 했던 시인 이상李箱은, 날개를 훨훨 저어 현실의 세계를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현실에서의 이상은 시인이자 작가이며, 소설가이자 수필가이고, 화가이면서 건축가이기도 하다. ‘시인 이상’은 그를 나타내는 표현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일단 발을 딛게 되면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경성이라는 도시는 시인 이상에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가 갇혔다는 미궁迷宮(또는 미로迷路) 라비린토스(Labyrinthos, 라비린스(Labyrinth))에 세워진 거대한 벽면 같아 보였을 수 있다.    

  

날개

               - 이상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내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그렇다면 시인 이상을 가두었던 미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수군거림이었을 수 있고, 하나를 채 정리하기도 전에 불쑥 튀어 오르는 무수한 환영들의 헝클어진 타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인간을 타락의 길로 이끌고야 마는 금전과 술과 담배의 마수이기도 했었을 것이고, 쾌락의 숲에서 이성을 마비시켜버리는 성性의 유혹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 문학가 이상李箱(본명 김혜경, 1910년 9월 23일 - 1937년 4월 17일)


또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분명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여겼겠지만, 젊은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방에 죽치고 앉아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거나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와 노닥거리거나, 단골 주점에 들러 술을 마시며 줄 담배를 피우거나, 경성의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 밖에는 달리 할 것이라곤 없었던 당시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 시인 이상을 가둔 거대한 또 다른 라비린토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만으로는 시인 이상과 그의 날개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부족할 수 있다. 진정 그를 가둔 미로는 무엇이었으며 그가 그토록 하늘을 날고 싶었던 까닭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 미로라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의 천재성이 빚어내고 있던 심적 카오스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로가 만들어진 이유는, 그가 미로에 빠진 원인은 분명 시인 이상 그 자신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인 이상의 날개와 미로     

시인 이상, 그가 빠져버린 미로라는 것이, 사랑하는 외아들인 이카로스와 함께 자신이 설계하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미로에 갇혀야만 했던 고대 그리스의 장인 다이달로스처럼, 그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가 빠져버린 미로의 벽은 넘을 수도 없고 고개 내밀어 저 편을 훔쳐보지도 못할 만큼 높고 견고한 ‘통곡의 벽’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상의 서양화 <자화상〉출처: Wikimedia Commons



어느 날 시인 이상은, 그 미로를 벗어날 방법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의 시 <날개>를 보게 되면, 다이달로스가 그의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미로 라비린토스를 빠져나갔던 방법처럼 어깻죽지 어딘가에 날개를 달고서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야만 한다는 것을 시인 이상은 깨닫게 된 것이다. 


시인 이상 또한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읽었을 테지만, 그래서 다이달로스가 날개를 제작한 방법을 알고는 있었을 테지만, 신의 아들로 태어난 다이달로스와 같은 신통방통한 손재주를 타고나지 못했기에 그 스스로는 날개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혹시 내가 당시의 경성에서 시인 이상과 같은 상황에 빠져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궁리를 하고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마냥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을 원망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분명 무엇인가는 하려고 들것이다.  


어떤 바람은, 그것이 간절하다면, 불쑥 이루어지기도 하나 보다. 어느 날 시인 이상의 겨드랑이에서 그가 그토록 바라던 날개가 돋아난 것이다. 어깻죽지가 아니라 하필 왜 겨드랑이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이 문제는 차후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어쨌든 자신의 몸에 솟아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 하늘이 어떠했을 지에 대해서는, 오직 시인 이상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인 이상에게 날개는 미로를 벗어나게 해 줄 구원의 수단이었고, 날아오름은 현실에서의 벗어남 또는 탈출이라는 행위와 이음의 동어였다.


하지만, 그의 시 <날개>를 꼼꼼하게 읽고 곰곰이 생각해본 이라면, “다시 돋아라.”라는 문장에서 시인 이상에게는 그날의 사건 이전에도 이미 날개가 돋아났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시인 이상은 그 날개를 잃어버렸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다시 날아올랐다는 기록의 부재와, 그의 간절한 바람처럼 ‘다시’ 날개가 돋아났다는 직접적인 언급의 부재로 인해 ‘상상력의 결핍’이라는 또 다른 미로에 빠져버리게도 된다.     


“시인 이상에게도 우리에게도 미로는 정녕 벗어날 수 없는 견고한 마법의 성城인 것일까.”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하늘을 날아야만 하는 것일까.”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천재 장인 다이달로스조차 미로를 탈출한 대가로 외아들 이카로스를 잃어야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한낱 범인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 미로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미로를 쌓아 올린 벽면과 벽면 사이로 보이는 길고 좁은 하늘을 하염없이 우러러보는 것뿐이란 말인가.  

         

다시 시인 이상에게로 돌아가 보자. 시인 이상의 미로가 그가 살아가던 일천 구백삼십 년대의 경성이라는 공간과 시간이었듯이, 우리의 미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일 것이다.


만약 시인 이상의 날개가 구원을 통한 영혼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미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오직 ‘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행여 나의 겨드랑이에서도 날개가 돋아나기를,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늘을 날아오르게 되기를, 새벽 첫 기도의 몽롱한 바람처럼 간절하게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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