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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달과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1. 달에 대한 이해     

빛과 어둠에 두었던 [논리의 시선]을 달에게로 옮겨 보자. 태양이 지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간에 있어서 양陽과 음陰의 기준은, 눈으로 느껴지는 밝음의 정도와 그것에서 느껴지는 온기의 정도를 고려한 것이다. 


이 두 개의 단어를 사전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양’은 ‘볕, 양지, 밝음, 뽀송함’을 뜻하고 ‘음’은 ‘응달, 습기, 축축함’을 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온기’의 개념이 양과 음이라는 단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보이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양지陽地와 음지陰地라는 단어에는 ‘따뜻함, 따사로움, 더움’이나 ‘시원함, 선선함, 차가움’과 같은 ‘온기의 정도’가 그 의미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화자의 감상과 연관된 감성적인 의미 또한 이 단어들에 포함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둠에 잠긴 세상에서 양과 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는 다른 시야가 필요하다. 낮과는 달리 밤의 달빛 아래에서의 양과 음은 오직 밝다는 것과 어둡다는 것만으로 구분될 뿐이고, 온기의 정도를 양지와 음지의 기준으로 삼지는 못한다. 그것은 달빛 아래에서는 오직 밝은 곳과 어두운 곳만이 존재할 뿐이라서 달빛의 조사에 따라 따뜻한 곳이나 차가운 곳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 * * *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판단을 위한 잣대인 ‘척도尺度’(평가하거나 측정할 때 의거할 기준)라는 것을 준비해야만 한다. 이성의 개입은 척도의 생성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이성이 개입된 척도’는 판단의 결과에 더욱 강한 논리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이때 너무 단순화된 척도는 감성이 개입할 여지를 여기저기에 남겨 두어 그것을 기준으로 삼은 결과를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단순화하여 감성이 끼어든 척도’의 이런 허술함을 ‘논란조차도 기꺼이 허용하려는 인간다운 포용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나 논리나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있어야만 말 한마디라도 슬며시 붙여볼 여지가 찾아지기 마련이다. 원래 너무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의 바닥에는 이끼가 끼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빈틈이 보인다는 것은, 적어도 이것저것 기웃대며 살펴보기를 좋아하는 생각 많은 이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빛의 여부로만 양과 음을 구분케 하는 달의 포용력이 태양의 그것보다 훨씬 더 넓고 크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까닭이 ‘태양을 강하고 엄한 아비’에, ‘달을 유순하고 편안한 어미’에 비유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살아남기 본능은 늘 강한 것을 동경하게 만든다. 그래서 강한 자의 이성이 언제나 지배적인 논리의 근간을 형성해 왔고 이에 따라 낮을 밝히는 태양은 언제나 인류의 숭배를 받아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라고 부르고 있는 12월 25일은 짧아진 겨울의 태양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에 맞추어 로마의 태양신인 [미트라]를 기념하는 날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양은 인간의 본능 속에 잠재된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연역하기에 끊임없이 강한 것을 경외하여 왔고 이에 따라 인간의 역사는 항상 강한 자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왔다. 인간은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하기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밤의 온순한 달이 아니라 낮의 강한 태양이 논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2. 달과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달은 태양보다 단순하다. 따라서 달에는 인간의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태양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 달은 태양보다 넓은 포용력을 통해 낮의 태양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고 낮 시간의 결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친 몸과 영혼을 이끌고 달빛 아래에 서면 달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포근하게 감싸준다. 그렇기에 달은 물리적인 온기와는 상관없이 편안하고 아늑함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온기 없는 달의 빛이 어미의 품 같이 따뜻하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물리적인 온기를 가지지 못한 달빛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인간의 감상은 역설적이어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달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태양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태양과 달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일 수 있다.  

    

* * * * *         

   

달은 두 개의 면을 갖고 있다. 그 중에 하나의 면은 늘 밝기만 하고 또 다른 하나의 면은 늘 어둡기만 하다. 달을 숭배하는 인간은 오직 달의 밝은 면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밤이 밝다.” 또는 “밤이 어둡다.”라는 표현은 달의 어두운 면과는 상관없이 오직 밝은 한쪽 면만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낮은 이성의 아비이고 밤은 감성의 어미이다. 남자는 낮 빛 아래에서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여자의 몸은 달빛의 주기를 따라 월경한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감성적인 존재인 것이다.     

 

남자란, 여자보다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조건 몇 가지에 있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그래서 스스로가 우세하다고 여기고 있는, ‘사내’라는 명칭으로 구별 되어지는 특정 종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들에겐 태초부터 감성이란 것이 부족하였기에 사내들은, 이성이란 것을 앞세우며 시시비비 따지기를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은 여자보다 쉽게 흥분하고, 중요한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왠지 귀찮을 것 같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여자보다 쉽게 판단을 내려 버리는. 허술한 구석을 가진 것이 사내들이다. 


태양의 지배를 받는 사내의 이러한 행태는 아침의 해 뜸과 저녁의 해짐에 있어, 그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사내들은, 아침빛이 채 떠오르기도 전에 새 하루를 서둘러서 시작하려고 하고 저녁 빛이 채 저물기도 전에 오늘 하루를 바삐 마무리 하려고 하게 된다. 또한 해 뜸과 해짐이라는 그 짧기만 한 시간 동안, 여명과 노을에 쏟아지는 파장 긴 햇빛이 사내의 머릿속을 온통 검붉게 물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 * * * *     


그 사내들도 밤이 되면 안식을 찾아 제 집을 찾아들기 마련이다. 남자에게 집은 여자이고 밤의 안식은 오직 여자의 품에서 찾아진다. 온전치 못한 밤의 안식은 불안한 일탈의 발원지가 되어,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낮의 사내를 점차 피폐하게 만든다. 그래서 밤의 안식은 사내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밤의 생명력은 달에게서 나온다. 결국 달은 인간, 남자와 여자 모두를 생명을 가진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근원인 것이다.   

  

하지만 달에겐 반대의 면이 존재한다. 인간은 달의 한 면인 오직 밝은 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려 하고 듣고자 하는 것만 들으려 하는’ 인간의 본능을 달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달의 또 다른 면은 밤이 밝을 때 어둡고, 어두울 때 저 혼자 밝을 수 있고 또는 항상 어둡기만 할 수도 있지만 지상의 인간 누구도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한다. 

물리적인 인간의 눈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그 면은 오직 감성의 심안을 통해서만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감성의 가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달의 한 면, ‘Another Side of the Moon'이다.     


해가 숨어버린 어두운 밤하늘에 자리 잡은 달의 밝은 면과, 그 뒤에 있을 어두운 면은 ‘인간의 양면성’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달의 주기를 따르는 글쟁이와 달 빛 아래 잠 못 이루는 이방 여행자는 자신의 양면성을 결코 부끄럽게 여겨야 할 어떤 이유도 없게 된다. 


그것은 글쟁이와 이방 여행자의 양면성의 원인을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달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쟁이와 이방 여행자를 온전하게 평가할 수 있는 세속적인 잣대는 결단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글쟁이와 이방 여행자는 세상 일체의 판단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밝음과 어두움이라는 달의 양면성에서 스스로의 위안과 자유의 논리를 찾는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고독하지만 영혼은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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