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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거리에서 루소를 만나다

사색과 매혹으로의 산책

도시의 거리에서 루소를 만나다  

                 


1. 장자크를 찾아서

  

“그 만큼이나 커피와 산책을 좋아한 이가 또 있었을까.”  

  

설혹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에게로 열려 버린 마음의 귀에는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곳은 그가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글처럼 ‘고독한 산책자가 몽상에 빠져들기에 좋은 세상’이기에, 산책과 커피라면 루소, 그이 하나면 넘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 


장자크 루소는 1778년 에름농빌에서 아침 식사를 하다가 쓰러져서 점심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 육십 하고도 여섯 번째의 해를 힘겹게 넘어가고 있던 때의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아, 이제 더 이상은 커피 잔을 들 수 없겠구나.”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는, 그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그의 커피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장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출처: WikiMedia Commons

          

누군가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이 때론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막아서는 높은 담장이 되기도 한다.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이자 계몽주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장자크 루소의 삶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그의 통속적인 삶과 책장에 꽂혀 있는 그의 사회적 이성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으면 장자크는 어느 누구보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물일 수 있다. 


지독한 에고(ego)를 앞장 세워 방탕과 무책임을 산책길의 친구로 삼은 것 같은 그의 삶을 더듬다가 되면 “가난과 모순을 마치 커피를 마시듯 유희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되어 그에게 퍼부어지는 세속의 비난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삶을 행여 ‘통속’이란 범주에 끼워 넣는다면, 통속이란 단어의 의미를 오직 그만을 위해 너무 확장시켜버렸다는 비난을 받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그를 감싸주고 싶은 것은 그를 아끼는 또 다른 에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어떤 행적이 그의 뒤를 따랐었던,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었던, 장자크의 천재성은 그를 늦은 저녁의 하늘에서 반짝이는 찬란한 별 하나로 새겨 넣어 버린 것을.”   

  

커피와 산책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의 에고를 마음껏 즐겼던 장자크 루소는 지금의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보다 더 도시인다운 지독한 검회색의 에고이스트인 것이다.     


    

2. 거리에서 루소를 만나다     


오후 내 빌딩 그림자에 갇혀 있던 도시의 좁은 하늘에서 어둠의 기운이 시나브로 내려앉고 있다. 쉬어갈 만한 벤치 몇 개를 툭 던져 놓은 공원 한편에 앉아 아직 식지 않은 커피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만지작거린다.


닫혀 있던 둥근 플라스틱 뚜껑을 조심스럽게 연다. 커피 향에 채색된 뽀얀 물기가 저녁 호수에 내린 물안개처럼 수면 위에 고즈넉하게 고여 있다. 행여 날아갈 새라 얼른 뚜껑을 닫는다. 조그마한 마개를 열어 조금씩 입속으로 흘려 넣는다.


키 큰 빌딩과 웃자란 나무 꼭대기에 걸린 하늘에는 검회색의 어둠이 스멀스멀 번져들고 있다. 늘 그랬듯이 도시의 시간은 쉬이 지나가는 법이다. 뻑뻑한 두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종이 잔을 살짝 흔들어 본다.     


“다행이다. 아직 남아있으니.”      


한 번쯤 더 짚어 보게 되는 것은 도시에서의 삶이 지어낸 오랜 버릇일 뿐이다.

바닥에 깔려 남은 진갈색의 묽은 액체 몇 방울로 이른 저녁의 갈증을 축인다. 온기 식어 버린 커피에서는 진하게 우려낸 아일리쉬 블랙 티의 느낌이 난다. 

     

“아무래도 좋다. 입안에 고인 이 갈색의 물 한 모금이면 저녁의 사색 한줄기 건져 올리기에는 아무런 부족함 없으니.”         


파리의 팡테옹(Panthéon)에 있는 장자크 루소의 묘(Pl. du Panthéon, 75005 Paris, France) 출처: WikiMedia Commons      

    

어제의 그 무렵처럼 시간은 그냥 흘러간다. 입에 대었다가 내려놓기를 뫼비우스의 띠를 돌듯 반복하다가 가벼워진 종이 잔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더 이상 커피 잔을 들 수 없을 것임을 아쉬워했다는 장자크 루소도 지금쯤이면 잔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주인 없는 종이 잔 하나가 옆자리 벤치 귀퉁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혹시 그가 다녀간 것일까.” 

“왜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까.”    


바로 옆에서 일어난 무엇인가라고 해서 꼭 때를 맞춰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지는 않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인지능력의 허술함 때문일 것이다.     


* * * * *     


도시의 거리에 밤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자 현란하게 피어났던 불꽃들이 하나씩 자신의 문을 내리고 있다. 

늘어진 걸음으로 한 블록을 겨우 지나기도 전에 한 사내의 검은 실루엣과 마주친다. 


오른쪽 검지에 걸고 있는 오래된 커피 잔과 왼쪽 옆구리에 꽂고 있는 두 권의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의 뒤를 바짝 좇는다. 밤의 어둠에 적응된 눈이 책의 날개 부분에 박혀 있는 글귀를 구분해 낸다.


1776년 출간된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Rousseau juge de Jean-Jacques)와 그의 미완의 저서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아, 장자크 루소, 바로 그이로구나.”     


걸음을 멈춘다. 어차피 그인 것을 확인하였으니 더는 쫓아야 할 필요는 없겠다. 이미 떠나가 버린 이는 마음으로만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손 흔들어 배웅한다.   

   

“다행이다. 더 이상 새 커피 잔을 들지 못할 것을 알았던 그는, 마지막에 잡았던 커피 잔을 영원히 내려놓지 않고 있으니.”     


언젠가 다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갓 내린 향 좋은 커피를 그의 잔에 가득 부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장자크에게서 배운다.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은 산책길에서도 마지막 순간에도, 결코 커피 잔을 내려놓지 않는 일이란 것을.     

장자크가 남기고 간 커피 향을 호흡하다가 서재로 돌아와서 책상에 앉는다. 


쓱쓱 문질러 그려내는 나의 글이 그의 산책길을 닮았으면 좋겠다. 묵힐수록 아련해져가는 글의 향기가 어릴 적 시골 마을의 저녁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구수한 밥 냄새를 닮아 간다면 정말로 좋겠다.     

글을 쓰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몽상에 빠져서도 결코 커피 잔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장자크 루소 효과’라고 부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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