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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그리고 혼돈

우리는 누구인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그리고 케이아스   

                

샤를 드골 공항의 활주로를 날아 오른 비행기가 어느 사이엔가 인도양의 하늘을 지나고 있다. 파리에서 보낸 두 주라는 시간은 어느덧 지난 시간의 한 철이 되어 간다.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떠오른다. 

어둑해진 파리의 골목길에서 그의 그림자를 쫓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랭보는 영원한 파리의 시인이니깐. 

젊은 날의 파리는 그로 인해 뜨거웠다. 랭보로 인해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가 파리로 스며들었으니. 

아니 그로 인해 쌀쌀한 파리의 돌바닥이 뜨거운 에티오피아의 나무 그늘 아래에 깔리게 되었으니. 

랭보로 인해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향기에 아프리카의 마른 풀 먼지가 서걱거리게 되었으니. 


―――――― α ――――――


팔걸이 아래에 숨겨져 있던 좁은 테이블을 끄집어내어 손바닥만 한 메모장을 그 위에 펼친다. 검은색 펜의 족적을 남기는 사이 깜빡 시간이 지나간다. 비행기의 실내에 갇혀있으면 빛과 어둠만으로는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깨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 또한 허물어질 수밖에. 비행기의 실내는 인체가 가진 생체시계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마법의 동굴과 같아서 늘어지는 글의 모든 문장은 늘 첫 문장인 듯 새롭고 어색하기만 하다. 


사피엔스의 선천적 본능은 ‘현명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생각’이란 것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의 특징이며, 생각한다는 정적인 행위는 살아있음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이다. 심지어 집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조차도 나름대로의 생각이란 것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사피엔스적이어야 한다. 사피엔스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이 인간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사전에서는 지성인(知性人)을 ‘지성(知性)을 지닌 사람’이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이 지적인 성품을 가진 인간으로서 행동할 때 붙여지는 명칭인 것이다. 


생각을 하긴 하지만 현명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사피엔스적이라고 할 수 없다. 현명함에는 길고 깊은 사색이 함께 해야 한다. 또한 사색은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현명한 호모 사피엔스라면 후천적 본능으로 알고 있다. 

사색을 하고 문장을 떠올리고 그것을 문자로 쓰는 것은 현명한 호모 사피엔스의 숙명이다. 오랜 시간을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던 사색의 부스러기들과 정수들을 긁어모아, 모서리 네모난 퍼즐 판 위에 첫 조각을 얹듯이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디디면 그것이 글의 첫 문장이 된다. 


―――――― α ――――――


어떠한 연유인 건, 어떤 식이었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지금의 이곳에 있게 된 아주 먼 옛적의 그날부터, 비와 바람과 구름, 햇빛과 물과 불과 흙은 원래부터 스스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히 이곳에 있어 왔다. 그것들에게는 공간만이 의미를 가졌을 뿐이지 시간이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간 아주 먼 후일에, 문득 또는 어떤 계기로 출현하게 된 일단의 개체 무리가, 이전부터 있어온 그러한 것들에 대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무한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그 거대한 것들에 대해 ‘자연(Nature, Mother Nature, 自然)', '스스로가 스스로에 의해 그러한 것들‘이라는, 아주 신비롭고 신성한 이름으로 묶어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그려낼 수 있는 인간의 시작을 ‘인간의 태초’로 본다면 ‘태초의 혼돈(Chaos)’은, 후일 이름 붙이기에 아주 능숙한 선택된 어떤 개체의 출현을 예비하기 위한 ‘재료의 준비 시기’가 시작된 ‘원시 태초’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얘기되고 있는 태초란 것은 바로 이 원시 태초를 일컫는 것이다.


‘원시 태초’에서부터 ‘인간의 태초’를 준비하기 위해 걸린 시간을 숫자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은 숫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시간은 ‘인간의 시간’ 일뿐이며, 원시 태초 이후 인간의 태초까지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정확하게 환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숫자라는 수단을 통해 그것을 크게 어림잡는 것뿐이다. 


어쨌건 간에 그때까지 걸린 자연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수억 년이거나 수 십 억년 또는 더 이상일 수도 있겠지만, 창조주의 시간으로는 단 며칠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창조주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더욱 가까울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그리고 신의 시간이라는 세 종류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α ――――――


언젠가부터, 그것이 신에 의한 것이건 또는 진화에 따른 것이건, 원시 태초에서 시작된 재료의 혼돈이 정리되어 가는 곳 어딘가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아주 특별한 개체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게 된 것은 그들은 철저하게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생각이 많은 존재였다. 

그들이 가진 하나의 생각은 다른 생각을 향해 무수한 가지와 뿌리를 뻗어 나가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존재로 진화시켰다. 결국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피엔스적인 특성은 그들과 다른 일반 개체들을 구분하는 분명하고도 뚜렷한 식별자가 되었다.   

        

Homo Sapiens Sapiens(H. S. Sapiens)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우리라는 인간(Human),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 S. Sapiens(Homo Sapiens Sapiens))는 인류학(anthropology)과 고생물학(paleontology)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한 아종(subspecies)으로, 호모 사피엔스 종중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는 유일한 인류(현생 인류)를 일컫는 용어이다. 

즉 현재 지구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중에서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인류는 크게는 호모 사피엔스라고도 할 수 있고, 범위를 줄여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게 되면 호모 사피엔스의 한 아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용어는 고생물학자와 인류학자에 의해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보다 고귀한 구성원들‘을 분리시켜 현대 인류의 특징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이에 따라 누군가를 사피엔스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비교적 단순하여 일차원적으로 느껴진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으며, 사피엔스 사피엔스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깊어서 다차원적으로 느껴지며 이에 따라 보다 고귀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현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그들의 원류인 호모 사피엔스 중에서 자연으로부터 또는 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존재란 것이다. 즉 인간이 고귀하다는 것은 ‘선택 받은 존재’이며 ‘현명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16만 년에서 9만 년 전에, 인류가 중동과 유럽, 그리고 나중에 아시아, 호주와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 α ――――――     


어쨌든 본질론으로 보자면, 언젠가부터 인간이라 부르고 있는 그들 현생 인류 무리의 본질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피엔스 사피엔스적인 것에 있고 그들 중 후일 철학자라 불리는 더욱 선택된 자들이 디딘 ‘현명하게 제대로 생각하기’의 걸음은 ‘인간답게 생각하기’라는 길고도 먼 여정에 선명한 족적을 새겨 넣었다.

그렇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겐 ‘인간의 태초’에서부터 생각을 통해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인 철학이 함께 해왔고, 재료의 혼돈에서부터 예비되었던 그들의 출현은 케이아스를 ‘생각하기의 종점이자 발상지’로 인지하게 되었다. 


결국 생각하기의 궁극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케이아스이기에 인간의 주관은 불안정하기 마련이고 늘 내적인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생 인류에게 있어 혼돈과 혼란스러움은 자연스러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현상일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케이아스의 짙은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간은 혼돈의 불안정함 속에서 불완전하게 이 땅에 나타났으니 부족함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려는 고집을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이다. 그 어리석음은 인간이 살아있음을 인지하게 해주는 표식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인간의 태초 이전에 있었다는 원시 태초의 케이아스에 어리석음과 불안정함과 불완전함의 맥이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에서, 고일석(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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