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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신학, 그리고 절대적 존재를 기다리며

철학과 신학, 그리고 절대적 존재를 기다리며   

                     

천한 신학자들과 천한 철학자들은, 그들의 글과 입만이 천한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천한 인간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성이란 ‘책임 없이 마구 늘어놓아도 되는 궤변으로 쌓아 올린 포대 더미의 성벽’ 일뿐이고, <철학>과 <신성>은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며,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허름한 헛간의 구석에서 퀴퀴한 곰팡내를 풍기며 썩어 들어가고 있는 허상의 배설물 덩어리일 뿐이다. 

그들의 배설물들은 진정한 <철학>과 <신성>을 오염시키고, 범인들의 <철학>과 <신성>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막상 범인들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신을 버린 인간에겐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인간은 결코 신을 떠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또한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기에, 결코 심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심판은 ‘버리거나 버림받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 격발되는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의 일종이기에, 그것의 원인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면 유효성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만약 ‘인간’이라는 존재가 전적으로 육체적인 진화라는 물질적인 작용에 의해서만 나타난 것이라면, 대체 인간의 영혼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영혼 또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영혼 또한 물질적인 작용이 생성한 결과물이란 말인가. 


이것에 대해 그들은 "인간에게 영혼은 없다."라고 자신 있게, 이성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근거를 체계적으로 나열해가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조목조목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이들을 진정으로 설득해낼 자신이 있단 말인가. 

그들이 그와 같은 ‘설득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설득’이라는 행위 또한 물질적인 기술이라고 할 것인가.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간의 진화란 오직 육체의 물질적인 진화를 말하는 것일 뿐, 결코 영혼의 진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집고 얘기해야만 한다. 


인간의 영혼은 <절대 존재>에 의해 태초부터 인간의 내면에 심겨 내려온 것이며 정신적인 사유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온 것이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 또한 일종의 진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혼의 진화는 육체의 진화와는 전혀 다른 줄기를 따라 지금에 이른 것이기에 육체와 영혼 모두를 '진화'라는 단어 하나로 묶게 되면, 또 다른 혼동에 부딪히게 될 것 같다. 


―――――― α ――――――     


신성에 대한 인간의 불신은 인간의 무지와 그들에게 내재된 불완전성에 기인한 것이기에, 신성에 의한 심판은 그들의 무지로 인한 영적 갈증을 해소시킨 후에나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는 인간 태초의 혼돈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어느 누구도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무지한 인간’이 심판대에 서는 일과, '무지한 인간'을 심판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지는 단지 계도의 대상일 뿐이지 결코 심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태초에 <절대적 존재>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진 계명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이미 이 지구상에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 α ――――――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중세의 철학자들이 “철학적으로 신을 증명하는 것에 실패했다.”라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다. 

인간은 철학적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든 신을 존재시키지 못하기에 '증명에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신은 인간이 증명할 수 있거나 증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태초부터 신이라는 <절대 존재>로써 존재해 오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태초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 <절대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태초'를 짐작하면서 '신'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일뿐이다. 

철학자 또한 인간이기에 혼돈에서 오는 사고의 흔들림을 피해 갈 수는 없지만, 뭔가 남기려는 그들의 지적 욕망이 인간의 언어를 빌어 “그것을 풀었다.” 또는 “그것은 틀렸다.", “그것은 풀 수 없는 것이다.” 또는 “그것은 난제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존재로 또한 사색할 줄 아는 존재로 태초부터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인간이라 해도 신성으로 향하는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 또한 지금의 자신이 있게 한 <절대적인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α ――――――      


"기다려야 해, 아직 오지 않았거든,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 또는 그녀는 분명 우리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오늘도 인간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감내하며 답이 없을 것 같은 답을 찾아 헤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답이 없을 것 같다.”는 것이 단지 '아직 답을 모르는 것일 뿐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답일 것 같은 것이라도 기꺼이 찾아 더듬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독한 부조리의 원인은 아마도 신성에 대한 인간의 혼돈에 있을 것이다.


글조차 필요하지 않았던 아주 오래전, <절대 존재>와 소통하는 <생각하는 자>가 인간의 무리를 이끌었듯,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철학적 신학자>와 <신학적 철학자>가 신성과 인간의 영혼을 이끌 때, 부족하고 불안정하기만 한 우리 인간을 이 지독한 케이아스에서 구원하게 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은, 다행스럽게도, 기다릴 줄 아는 존재이다. 어쩌면 기다리는 능력으로 인해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치에 올랐을 수도 있다.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읽으며, 밤하늘의 별빛을 따라 산책을 하며, 인간은 그 또는 그녀를 기다린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고귀한 존재에게 붙여진 명칭인 것이다.     


뉴욕에서, 고일석(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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